만약에 한 마을이 절반씩 완전히 다른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면 어떤 현상이 빚어질까요.
동해안 삼척시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고포마을'은 그런 마을 입니다.
마을은 백두대간에서 바닷가 까지 뻗어내려간 야산의 계곡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대략 40여세대. 바닷가 야산 계곡을 보금자리로 40여세대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으니까 그냥 한마을 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은 두개의 행정구역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쪽에 자리잡은 주민들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2리 주민들이고, 남쪽 주민들은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2리 입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가르는 자연지물은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 뿐입니다. 도로라고 해도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실 개천을 복개한 것 이어서 사실 폭이 3m 정도밖에 안되고, 차선 구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길 입니다.
이 길을 경계로 북쪽이 강원도 이고, 남쪽이 경상북도 입니다.
그냥 한마을이기에 강원도에 속해있든, 경상북도에 속해있든 모두 '고포마을'로 통합니다.
저는 이 마을을 처음 만났을 때 세상에 이떻게 이렇게 행정구역을 나눌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정말 경악했습니다.
1995년. 제가 삼척에서 기자로 근무할 때인데, 우연히 도(道)경계마을을 찾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당시만해도 고포마을은 강원도 쪽에서는 해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갖춰져 있지 않아 그 당시만해도 7번 국도를 타고 도 경계를 넘어 경상북도로 진입한 뒤 그쪽에서 마을의 유일한 진입로인 비탈길을 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야트막한 야산 비탈길을 구불구불 몇굽이 돌아가니 바닷가를 끼고 계곡 사이로 고포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눈이 휘둥그레 집니다. '범죄없는 마을' 표지판이 마을 입구에 두개가 서 있는데 하나는 춘천지방검찰청에서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세운 것 이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니 주민들이 한가롭게 미역을 말리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가 조선시대 나랏님에서 올리던 진상 미역으로 유명한 '고포 미역'의 생산지 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마을 아이들도 동네 공터에 모여 함께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다니는 학교가 다릅니다. 아침이 되면 강원도 아이들은 원덕읍내 호산 초등학교로 가고, 경상북도 아이들은 울진쪽 초등학교로 등교합니다.
주민들 얘기를 들어보니 더욱 신기합니다. 매일 해가 중천에 걸리면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들이 들어오는데, 울진우체국과 삼척우체국에서 두분이 우편물을 들고 들어온다고 합니다.
한마을이지만,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다 보니 편지, 소포 등 우편물이 주소에따라 삼척과 울진우체국으로 갈려 전달이 되는 것 입니다.
주민들 사이의 전화도 시외전화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강원도인 북쪽과 경상북도인 남쪽 주민들의 주택이나 편의 복지시설도 많이 차이를 보였습니다. 경상북도 쪽 고포마을은 어업인 복지시설이 비교적 충실히 갖춰져 있고, 주택 개량도 잘 돼 있는데 반해 강원도 쪽 고포마을은 한눈에 보아도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이렇게 복지나 생활수준에 차이가 나니 현지 강원도 쪽 주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소외감이 얼마나 컸을지는 말 안해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강원도 쪽에서는 직접 마을로 들어가는 길도 없어 경상도 쪽으로 한참 돌아서 들어가야 하는 지경이었으니 강원도 행정구역에 속한 고포마을 주민들의 불편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때 돌아온 뒤 이 마을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찾자는 기사와 함께 두 마을을 비교 분석하면서 강원도의 관심을 촉구하는 기사를 참 많이 썼는데, 그런 세간의 노력들이 기폭제가 돼서인지 이후 삼척쪽에서 고포마을로 연결되는 해안도로도 뚫리고, 부족한대로 강원도 차원의 지원사업도 제법 펼쳐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다 변해도 안 변한게 한가지 있습니다. 행정구역 명칭입니다. '진상미역의 본고장' 그포마을은 오늘도 여전히 북쪽은 삼척시이고, 남쪽은 경북 울진군 입니다. 주민들이 한동네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생활여건상 강원도나 경상북도나 고포마을을 절대로 상대에게 넘겨줄 수 없는 자존심 같은게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이 저쪽 행정구역으로 가겠고 하면, 그건 주민을 살피는 그쪽 행정의 후진성을 보여는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원도든 경상북도는 고포마을의 행정구역 통합 문제에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지난 1995년 전국적으로 시,군 통합을 할때 고포마을 행정구역도 하나로 만들어주자는 논의가 당시 내무부(현재 안전행정부) 차원에서 이뤄져 주민 투표까지 이뤄졌지만, 결국은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줄다리기 끝에 유야무야 되고 만 전력도 있습니다.
도 경계마을 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앞으로도 고포마을은 하나의 행정구역을 갖기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행정구역이 달라도 범죄없는 마을 명성 그대로 주민들이 이웃사촌의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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