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고고학적 발견에 꽃핀 기자들의 빛나는 예지

좋은산 2013. 8. 21. 18:31

중국 서안(西安)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진시황릉을 구경하고 돌아 올 겁니다.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스스로 시황제라고 칭하면서 '황제(皇帝)'라는 명칭을 가장 먼저 사용한 진시황제의 유명세 만큼이나 그의 능도 인류사의 불가사의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기 때문인데요. 저는 아직 진시황릉을 구경할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역사성과 사실적 위용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기에 더욱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왜 난데없이 진시황릉 얘기를 꺼내냐고 의아해 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세계 고고학사에서 비길데없이 뛰어난 가치를 지닌 진시황릉의 발견에 '기자(記者)'의 역할이 참으로 컸기에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려는 것 입니다.
 중국 산동성 출신인 웨난(岳南)기자가 쓰고, 심규호-유소영 교수가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부활하는 군단' 책의 내용을 토대로 진시황릉 병마용갱 발견 과정을 간단하게나마 한번 살펴보죠.
 진시황릉 병마용갱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습을 나타낸 것은 지금부터 35년전, 1974년인데요.
 진시황릉이 자리잡고 있는 섬서성 임동현 여산 자락은 그해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뭄이 세계적 발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가뭄에 시달리던 마을 사람들이 수원을 찾기위해 땅을 파던중에 진시황릉 병마용의 파편이 발견되는 것 입니다.
  여기저기서 흙으로 빚은 진시황릉의 무사 도용(陶俑)이 출토되고 일부 무기까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오지 농촌마을 주민들은 그 가치를 결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옛날 물건이 나왔다며 집으로 가져가 전시도 하고, 아이들이 밭에서 놀잇감으로 사용하는 황당한 일이 아주 자연스레 벌어졌습니다.
 그때, 이 유물들을 눈여겨 본 사람이 나타나는데요.
 때마침 고향에 와서 휴가를 즐기던 신화통신사 기자 인안온(藺安穩)이었답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도용의 모습을 본 기자는 직감적으로 2000년전 진나라 병사의 모습이라고 판단, 역사학 방면의 지식을 동원해 한편의 기사를 작성하는데, 그가 쓴 기사는 진시황릉 지하군단의 출현을 세상에 알리는 역사적 포고문이 됐습니다.
 당시 인안온 기자가 작고한 기사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섬서성 임동현 여산자락의 진시황릉 부근에서 무사 도용이 출토됐다.

 도용은 그 키가 1.68m 정도이며 군복 차림에 무기를 들고있다. 그것은 진나라때 사병의 형상에 따른 것이다. 실제 사람과 똑 같이 만든 이 입상(立象)의 도용은 지금까지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진시황릉 주변에는 이전에도 도용이 출토된 바 있었으나 모두 그리 크지않은 궤용들이었다. 이 입상의 출토물이 진귀한 이유는 무사용(武士俑)들이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진시황 때의 사병의 모습에 대해서는 역사서에 기록된 바가 없다. 이 무사용은 올해 3-4월에 그 지역 농민들이 우물을 파던중 발견한 것이다. 출토 상황으로 추측해 볼때 도용 위에는 집이 세워져 있었는데, 나중에 항우가 이를 불태우자 집이 무너졌고, 이후 2천년 동안 매장돼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중략)
 진시황릉은 전국 중점 유물 보호 단위이기는 하지만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농민들은 마음대로 능묘에서 흙을 파내 구덩이를 만들고, 띵을 개간해 종자를 심는다. 출토된 유물 중의 금속제품은 폐품으로 취급당해 없어지기도 했으며, 일부 석제나 도기 제품도 함부로 팽개쳐져 있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출처=부활하는 군단, 일빛 발간, 2001년 ) "

 

 매우 세련되게 단문 처리를 하면서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발견과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보호대책도 호소한 빼어난 기사 입니다. 글을 통해 인안온 기자가 매우 뛰어난 역사적 식견과 지식을 체득하고 있다는 것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2천년 동안 땅속에 몯혀있던 진시황릉 병마용갱이 어둠을 뚫고 세상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그 유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것 이라고 할 수 있죠. 인안온 기자의 이 기사 한편이 모택동과 주은래 등 당시 중국을 쥐락펴락하던 지도자들의 눈에 띠면서 2천년전 지하군단은 드디어 베일을 벗고 세계의 보물로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기자와 언론의 역할을 살펴보려 한다면 우리나라 봉평신라비의 발견 또한 매우 드라마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봉평 신라비 발견과정도 한번 살펴볼까요.
 현재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에 보존되고 있는 봉평신라비(국보 242호)는 1988년 4월15일, 대구매일신문에 의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는데요. 대구 매일신문은 그날 신라 비석 발견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사실 일간신문이 역사문화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리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승례문이나 낙산사 동종이 화재로 소실된 경우 처럼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거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뛰어넘어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새로운 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정도의 기사가 1면 톱으로 대접받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날 매일신문이 보도한 신라 비석발견 기사가 그랬습니다. 비석은 한줄의 역사 기록이 아쉬운 신라 중-고대사 연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습니다.
 비석이 천년 빗장을 풀고 대구매일신문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한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비석은 당초 그해 1월20일 봉평들의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던중 발견됐습니다. 포클레인으로 객토작업을 하던중에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바위 하나가 걸려 올라온 것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빛을 보게 된 비석은 그러나 한동안은 논 옆의 개울가에 방치되는 신세에 처합니다. 세상이 그 가치를 알아주기 전까지는 아무리 중요한 신라 비석도 그냥 '쓸데없는 바위 덩어리' 였던 것 입니다. 그런데 냇가에 방치되던 넓찍한 바윗돌을 마을이 이장님이 눈여겨 보게 됩니다. 우연히 흙으로 표면이 덮혀있는 바위 한면을 손톱으로 긁어보다가 무수히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이장은 이상한 돌이 나왔다고 울진군 공보실에 신고를 하게 됩니다. 그때가 3월21일이었다고 하니 울진봉평비는 발견 이후 2달 동안이나 개울 옆에 뒹구는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 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작업이 이뤄지고, 마침내 그해 4월15일에 대구매일신문이 특종 보도를 하게 됐으니, 만약 마을 이장님이 비석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국보-울진 봉평비는 개울 속으로 밀려 들어가 잡풀더미가 자라면서 미꾸라지가 드나드는 물고기 집 정도의 신세로 완전히 전락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봉평신라비는 당시 문화재관리국과 대구대학교 연구팀, 한국고대사연구회 등의 조사를 거쳐 법흥왕 11년, 524년에 세워진 것으로 판명되는데요. 398자의 글자가 새겨진 비석은 발견 당시에는 현존하는 신라 금석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이었습니다.(봉평신라비가 발견된 1년 뒤 경북 포항시 신광면 토성리에서 영일 냉수리비(지증왕 4년, 서기 504년 건립)로 불리는 비석이 또 발견됨에 따라 울진봉평비는 지금은 현존 최고의 신라 비석은 아닙니다.)

 

  *참고로 울진봉평비는 신라에 편입된 울진지역 주민들이 신라의 부당한 대우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 중앙 정부에서 대군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고, 다시 그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지역의 토호들에게 곤장 등의 형을 집행한 내용 등을 담고있어 신라 6부제와 형벌제 연구 등에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봉평신라비는 신라가 현재의 삼척지역에 실직주를 개설한뒤 꼭 19년이 경과한 시점에 건립이 됐는데요. 따라서 당시 반란을 일으킨 주역들은 실직의 옛 주민들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즉, 신라가 삼척 울진지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시킨 뒤 원래 신라민이었던 경주 인근 지역 주민들과 달리 부당한 대우를 하자 그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향토사학계의 일반적 분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