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산사(山寺) 풍경이 그리울때 제가 즐겨 들춰보는 글이 있습니다.
혜곡 최순우(1916년∼1984년)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본문 내용중 경북 영주의 부석사를 소개하는 글 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다가 정말 눈이 시린 글맛이 바론 이런 것 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화재를 직접 보지 않고도 독자가 그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참 멋에 도취할 수 있도록 하는 글의 힘. 최순우 선생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평'은 정말 한폭의 빼어난 수채화를 눈 앞에 펼쳐놓은 듯 합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중략)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최순우(崔淳雨) 선생은 평생 '박물관 인'이라고 불린 우리 문화재의 가장 친근한 벗 이셨습니다.
지금 북한 땅, 개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문학도를 꿈꾸다 1946년 국립개성박물관에 근무하면서 관장 고유섭(高裕燮) 선생의 감화를 받아 본격적으로 고고미술을 연구해 국립중앙박물관장(1974년 취임)을 역임하는 등 미술사학과 평론에 한평생을 바쳤습니다.
선생의 글은 소박하면서 품격이 있고, 단아하면서도 가슴에 열정이 끓게하는 말 그대로 홀리는 듯한 흡인력이 압권입니다. 형용사가 겹치는 과도한 수사학이 있다고 해도 결코 격조를 잃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선생이 우리 문화재를 평 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가슴 저미게 고맙습니다.
안개비 내리는 초겨울, 선생이 주심포 양식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희한한 아름다움에 사무치는 고마움을 느낀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 꼽힙니다. 물론 또 다른 이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면 또 다른 시각으로 그 아름다움을 예찬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최순우 선생의 순결한 미학(美學)을 끊임없이 본받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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