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어명이요, 숭례문에서 다시 천년을 살 소나무

좋은산 2013. 8. 21. 18:52

(지난 2008년 12월 국보 1호 숭례문 복원용으로 삼척시 신기면 활기리 준경묘에서 황장목이 벌채될 때 현장을 보고 쓴 글 입니다. 삼척 준경묘의 황장목을 기둥과 추녀, 대들보 등 중요 목재로 사용한 '대한민국의 자존심 숭례문'은 지난 5월, 5년3개월의 복구 공사를 마치고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어명이요"
 12월10일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역 주변 산에서 한 목수가 도끼로 큰 나무 밑둥을 찍으면서 "어명이요"라는 말을 세번 외쳤습니다.
 순간, 주위에는 카메라 셔터 소리만 요란하게 울릴 뿐 200여명의 참관객들이 모두 숨을 죽여 숙연한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그리고, 숙련된 목수가 톱질을 시작한지 5분여 뒤 110년을 이곳에서 꼿꼿한 기상을 자랑해온 금강 소나무 한그루가 '우지직' 소리를 내더니 넘어갔습니다.
 지난 2월 불에 타 소실된 국보 1호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금강소나무 입니다.
 문화재청은 이곳 준경묘 묘역 주변 산에서 흉고 직경 70-80cm 크기 소나무 20-30그루를 벌채,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각각 10그루씩 사용할 계획입니다.
 이곳에서 벌채되는 소나무는 모두 대들보와 추녀, 기둥 등 중요 목재로만 활용됩니다.
 우리 소나무의 대표격인 금강소나무는 전통건축에서 최고의 목재이지만, 이제는 전국의 산을 뒤져도 기둥으로 쓸 만한 것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목을 받게 된 곳이 이곳 삼척의 준경묘역 소나무 입니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마을에서 산길로 약 3-4km 정도를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준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인 양무장군(陽茂將軍)의 묘소로 문화재청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120만평 정도의 산에 잘 자란 금강소나무가 빼곡합니다.
 묘역까지 가는 3-4km 산길은 사륜구동 지프차만이 통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고, 굽이가 심한 곳이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소나무 길이 펼쳐집니다. 어른이 두팔로 안아도 반 정도 밖에 안을 수 없는 아름드리 금강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으니 정말 장관이지요.
 문화재청은 이곳의 소나무를 사용해야만 국내에서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의 기둥감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이곳 묘역을 관리해온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준경묘 봉향회와 활기리 마을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이날 소나무 벌채에 들어간 것 입니다.
 오전 11시, 소나무 벌채에 앞서 준경묘에서는 '왕'에 대한 제례 격식에 따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종친들이 먼저 고유제를 지냈습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종친들이 준경묘 앞에서 나무를 벤다는 것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산길로 500여m를 들어가 묘역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리 정해놓은 벌채 대상 소나무에 표지 띠를 두르고, 벌채 참가 관계자들이 산신제를 지냈습니다.

 산에서 좋은 소나무를 베어간다는 것을 알리고, 아무 사고없이 벌채작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식이죠.
 그런 다음에는 목수들이 북어와 창호지를 벌채대상목 옆나무에 실타래로 묶는 소지매기 행사가 이어지고, 삼척시 산림 담당자가 벌채목의 밑둥 껍질을 벗겨내는 근부박피를 한뒤 껍질을 벗겨낸 곳에 벌채 검인 도장을 찍는 절차가 진행됐습니다.
 본격적인 벌채는 그 다음부터인데요.
 광화문 복원에 참여하고 있는 대목수 한사람이 도끼를 들고 나무 옆에 서더니 도끼로 밑둥을 세번 내려치면서 "어명이요"를 세번 반복했습니다.

 

 

 

 (사진 위) 금강소나무 벌채 참가자들이 숭례문 복원에 쓸 황장목을 벌채하겠다는 것을 알리는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 아래)광화문 복원에 참여하고 있는 대목수가 "어명이요"를 외치면서 숭례문 복원 목재로 쓰일 금강소나무 밑둥에 도끼를 내려치고 있다.

  

 나무를 베면서 왜 "어명이요"라고 외쳐야 하는지, 참 궁금하죠.

 이날 벌채행사에는 궁궐 도편수로 평생을 살아온 신응수(중요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씨가 지휘를 하기 위해 참석했는데, 신씨는 "100년 이상을 산 큰 나무이다 보니까 생물인 큰 나무를 베는 것을 목수들도 두려워하고, 꺼려한다"고 먼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목수 본인이 자의로 나무를 베는 것이 아니라 나랏님, 즉 임금님의 명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베게됐다는 것을 알리는 의미에서 "어명이요"라고 외친다고 했습니다.
 큰 나무를 베면서 나를 탓하지 말라고 나무에게 알리고, 도끼질을 한 사람에게 피해가 오는 것을 막는 일종의 주술인 셈이죠.
 그것을 통해 목수들은 생명이 있는 나무에 대한 인간적 미안함을 덜고, 나무를 베도 괜찮다는 일종의 심적 위안을 삼는 것 같았습니다.
 도끼질 세번이 끝난 뒤 톱질에는 다른 목수가 등장했는데요. 톱질을 하는 목수는 정말 기(氣)가 센 목수라야 한 답니다. 그래서 이번 숭례문 복원 소나무 벌채에도 지난 1985년부터 소나무 벌채를 전문적으로 해온 목수가 직접 톱을 들고 주관했습니다.
 신 대목장의 말인 즉, 큰 나무를 베어넘기는 것도 일종의 기 싸움인데, 목수가 기에서 밀리면 그 나무를 베는 일은 어려워 진다고 합니다.
 "이 큰 나무를 내가 어떻게 베어넘겨"라는 식으로 처음부터 주눅이 들어버리면 산판의 벌목행사, 특히 궁궐용 목재 벌채는 진행이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가 센 목수가 주로 톱을 잡게 되는데, 도끼를 든 목수가 "어명이요"를 외치면서 벌채되는 나무를 위로하는 반면 톱을 든 목수는 자신감있게 기로써 큰 나무를 완전히 제압하고 베어넘긴 다는 것 입니다.
 이날 준경묘 금강소나무를 벌채한 목수는 정말 장인다웠습니다.
 5분여 동안 나무 둘레를 둘아가면서 톱질을 해 베어넘기는데,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넘어간 뒤 잘린 단면을 보니까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매끈했습니다.
 수십년 내공과 수련이 쌓인 장인이 아니면 엄두도 못낼 일 입니다.
 주위에서 "참 잘 베었다"며 찬탄이 이어졌습니다.

 

 

 

 평생 궁궐 건축 장인으로 살아 온 대목장 신응수씨가 금강소나무가 벌채가 끝난 뒤 취재진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나무가 넘어가자 목수들이 달라붙어 나이테를 확인하는데요. 이날 처음으로 벤 금강소나무는 나이테가 110년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구한말에 이곳에서 싹을 틔운 뒤 눈 비를 맞아가며 올곳게 커 온 소나무인 것 입니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숭례문 복원 용 금강소나무들은 너무 잘 자란 탓에 잘려나가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아쉬워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는 이 소나무도 쓸모없는 고목으로 꺾이고 말겠죠. 그 전에 궁궐의 기둥이나 대들보 목재로 다시 살아나 천년 문화의 생명력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게 대목장들의 지론입니다.
 벌채된 소나무에 대해 신응수 대목장은 "속으로도 송진이 가득차 비를 맞아도 썩지않고, 단단하기가 이를데없어 절대 부러지지 않는 최고의 목재"라고 평가했습니다.
 황장목 벌채 현장을 지켜보면서 삼척에서 벌채되는 스무그루 황장목이 수도 서울의 도성 성문인 국보 1호 숭례문과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정문 광화문 복원 목재로 훙륭하게 사용돼 천년 생명을 화려하게 빛내기를 기원했습니다.
 그 뒤 준경묘 너른 잔디밭에 앉아 문화재청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왕'께 고유제를 올리면서 사용했던 제주(祭酒)로 음복도 했습니다.
 참고로 이곳 준경묘역의 소나무는 지난 2001년 충북 보은의 정이품 소나무와 혼례를 올리기도 했고요. 지난 2005년에는 아름다운 천년의 숲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쯤 들러 깊은 솔향에 취할만한 곳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