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몽골 제국 초기의 재상으로 제국의 기초를 닦았던 야율초재(耶律楚材, 옐뤼추자이)가 한 말입니다.
원사(元史)에는 아버지 징키스칸의 뒤를 이어 대칸의 자리에 오른 오고타이 칸이 야율초재에게 "나는 아버지께서 세운 대제국을 개혁하려 한다. 좋은 방안을 말해달라"고 묻자 야율초재가 이렇게 답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자꾸 새로운 제도나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것 중에서 백성들의 삶을 옥죄는 불필요한 것 부터 줄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야율초재.
야율초재.
중국사에 정통한 진순신(陳舜臣, 일본 고베 출신의 대만인 화교 작가) 선생은 야율초재를 살육으로 점철된 초원의 역사와 법도를 문명에 눈 뜨게 한 지성 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진순신 선생의 평가 처럼 야율초재는 몽골의 기병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3세기 정복의 세계에 꽃핀 지성이었습니다.
후일 중국의 역사가들은 야율초재가 없었더라면 숱한 중원(중국)의 백성들이 살육을 피하지 못했을 것 이라고 규정합니다.
정복과 침탈, 복수로 하루 해가 뜨고 지던 시절, 야율초재는 숱한 교훈들을 만들어내며 백성들을 구하는데 진력합니다.
1232년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당시 개봉)를 포위, 맹공격을 가한뒤 성을 함락시켰을때 총사령관이던 수베데이는 개봉 백성 130여만명을 다시 학살의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맞선 개봉의 저항, 특히 몽골군이 항복을 권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들의 목을 치는 등의 저항은 몽골군의 정복전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항이었던 것 입니다.
이때 '도성(屠城)'이라고 일컬어지는 학살극을 막고 나선 이가 야율초재 였습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을 찾아가 진언합니다.
"우리가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모두 땅과 백성을 얻기 위한 것 입니다. 그런데 땅을 얻어도 만약 백성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물은 풍족함을 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야율초재의 이 진언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130만 개봉 백성들을 구하는 사자후였습니다.
야율초재는 원래 거란 사람입니다. 요즘 '대조영'이라는 TV 사극을 보면 거란인들이 자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모진 애를 쓰는 모습이 나오는데, 거란인들은 10세기초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이 출현 하면서 드디어 916년 '요(遼)'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이 요나라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않은 피해를 입히게 되는데요.
야율아보기는 중국으로 진출하기 전에 배후의 후환을 없앤다는 차원에서 발해를 먼저 공격해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발해,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의 변경를 끊임없이 침입하게 되는데, 강감찬 장군이 활약한 귀주대첩이나 서희가 외교술로 지킨 강동6주나 모두 거란과의 다툼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요나라는 1125년 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해 다시 멸망합니다. 야율초재는 야율아보기의 피를 이어받은 요나라 왕족이었는데, 금나라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면서 선대부터 금나라 조정에 출사를 하고, 본인 또한 금의 녹을 먹게 된 인물이었습니다.
야율초재는 1212년 몽골군이 금나라 연경(현재의 북경)을 침입했을 때 20대 약관의 나이로 징기스칸과 조우하게 됩니다. 일찍이 야율초재의 명성을 듣고 있던 징기스칸이 야율초재를 데려올 것을 지시하고, 그의 아름다운 수염과 학식에 징기스칸이 크게 반합니다.
징기스칸이 야율초재에게 묻습니다.
"어떠하냐, 예전에 너희 거란이 금나라에게 멸망했는데, 오늘 짐이 그대를 위해 복수를 해주랴?"
야율초재가 대답합니다. "이미 금나라의 관직을 받고, 그 녹을 먹은지 오래인데, 어찌 원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징기스칸이 다시 묻습니다. "내 부하가 되지 않겠는가?"
야율초재 대답, "공부를 한 것은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어찌 약탈과 학살을 일삼는 당신의 부하가 되겠는가"
서슬퍼런 몽골군의 막사 안에서 대칸에게 맞서는 이 서생을 보고 징기스칸의 막료 장수들이 크게 노합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야율초재의 말에 일리가 있다며 결국 연경에서 왕족들만을 처형한 뒤 백성들은 학살하지 않고 기술자, 학자 등을 몽골의 초원으로 끌고가는 조치를 내립니다.
야율초재는 이후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징기스칸의 간곡한 권유로 군사(軍師)가 되고, 서역 원정에까지 동행합니다.
징기스칸은 눈을 감으면서 아들 오고타이에게 "초재는 하늘이 우리를 위해 보낸 사람"이라며 스승 처럼 받들라는 유지를 남깁니다.
2대 칸 오고타이를 섬기게 된 야율초재는 틈만나면 직언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데요. 황제의 잘못에 대해 직언이 이어지자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에게 "짐은 그대가 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는데, 어찌 그대는 짐에게 하지말란 말만 하냐"고 타박을 놓았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또 초창기 야율초재가 징기스칸으로부터 무거운 대우를 받자 몽골의 한 장수가 "전장에서 활 잘 쏘고, 칼 잘 쓰는 장수가 으뜸이지, 저런 서생이 모슨 필요가 있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진순신 선생의 평가 처럼 야율초재는 몽골의 기병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3세기 정복의 세계에 꽃핀 지성이었습니다.
후일 중국의 역사가들은 야율초재가 없었더라면 숱한 중원(중국)의 백성들이 살육을 피하지 못했을 것 이라고 규정합니다.
정복과 침탈, 복수로 하루 해가 뜨고 지던 시절, 야율초재는 숱한 교훈들을 만들어내며 백성들을 구하는데 진력합니다.
1232년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당시 개봉)를 포위, 맹공격을 가한뒤 성을 함락시켰을때 총사령관이던 수베데이는 개봉 백성 130여만명을 다시 학살의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맞선 개봉의 저항, 특히 몽골군이 항복을 권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들의 목을 치는 등의 저항은 몽골군의 정복전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항이었던 것 입니다.
이때 '도성(屠城)'이라고 일컬어지는 학살극을 막고 나선 이가 야율초재 였습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을 찾아가 진언합니다.
"우리가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모두 땅과 백성을 얻기 위한 것 입니다. 그런데 땅을 얻어도 만약 백성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물은 풍족함을 줄 수 있겠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야율초재의 이 진언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130만 개봉 백성들을 구하는 사자후였습니다.
야율초재는 원래 거란 사람입니다. 요즘 '대조영'이라는 TV 사극을 보면 거란인들이 자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모진 애를 쓰는 모습이 나오는데, 거란인들은 10세기초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이 출현 하면서 드디어 916년 '요(遼)'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이 요나라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않은 피해를 입히게 되는데요.
야율아보기는 중국으로 진출하기 전에 배후의 후환을 없앤다는 차원에서 발해를 먼저 공격해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발해,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의 변경를 끊임없이 침입하게 되는데, 강감찬 장군이 활약한 귀주대첩이나 서희가 외교술로 지킨 강동6주나 모두 거란과의 다툼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요나라는 1125년 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해 다시 멸망합니다. 야율초재는 야율아보기의 피를 이어받은 요나라 왕족이었는데, 금나라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면서 선대부터 금나라 조정에 출사를 하고, 본인 또한 금의 녹을 먹게 된 인물이었습니다.
야율초재는 1212년 몽골군이 금나라 연경(현재의 북경)을 침입했을 때 20대 약관의 나이로 징기스칸과 조우하게 됩니다. 일찍이 야율초재의 명성을 듣고 있던 징기스칸이 야율초재를 데려올 것을 지시하고, 그의 아름다운 수염과 학식에 징기스칸이 크게 반합니다.
징기스칸이 야율초재에게 묻습니다.
"어떠하냐, 예전에 너희 거란이 금나라에게 멸망했는데, 오늘 짐이 그대를 위해 복수를 해주랴?"
야율초재가 대답합니다. "이미 금나라의 관직을 받고, 그 녹을 먹은지 오래인데, 어찌 원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징기스칸이 다시 묻습니다. "내 부하가 되지 않겠는가?"
야율초재 대답, "공부를 한 것은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어찌 약탈과 학살을 일삼는 당신의 부하가 되겠는가"
서슬퍼런 몽골군의 막사 안에서 대칸에게 맞서는 이 서생을 보고 징기스칸의 막료 장수들이 크게 노합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야율초재의 말에 일리가 있다며 결국 연경에서 왕족들만을 처형한 뒤 백성들은 학살하지 않고 기술자, 학자 등을 몽골의 초원으로 끌고가는 조치를 내립니다.
야율초재는 이후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징기스칸의 간곡한 권유로 군사(軍師)가 되고, 서역 원정에까지 동행합니다.
징기스칸은 눈을 감으면서 아들 오고타이에게 "초재는 하늘이 우리를 위해 보낸 사람"이라며 스승 처럼 받들라는 유지를 남깁니다.
2대 칸 오고타이를 섬기게 된 야율초재는 틈만나면 직언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데요. 황제의 잘못에 대해 직언이 이어지자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에게 "짐은 그대가 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는데, 어찌 그대는 짐에게 하지말란 말만 하냐"고 타박을 놓았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또 초창기 야율초재가 징기스칸으로부터 무거운 대우를 받자 몽골의 한 장수가 "전장에서 활 잘 쏘고, 칼 잘 쓰는 장수가 으뜸이지, 저런 서생이 모슨 필요가 있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야율초재가 한말도 유명합니다. "당신이 쓰는 활을 만드는데, 궁장이 필요하듯이 큰나라를 경영하는데는 나와 같이 국가 경영을 하는 장인이 필요한 것"이라는 요지의 말입니다.
그런 야율초재에 대해 "제국은 말을 타고 건설할 수 있지만, 말을 타고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라는 평가가 뒤에 이어집니다.
그런 야율초재에 대해 "제국은 말을 타고 건설할 수 있지만, 말을 타고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라는 평가가 뒤에 이어집니다.
갑자기 야율초재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데 그것은 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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