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시조새가 살던 곳의 풍광이 이러했을까.
삼척 덕항산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세를 살펴보는 순간부터 신비감과 중압감이 동시에 움트는 산이다.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심산 골짜기를 감싸며 산 전체가 아예 수직으로 서있다시피 하니 처음 덕항산을 만나는 산객들은 "저 산을 어떻게 오른단 말인가"라는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고, 오직 눈으로만 구경하는 것을 허하려는 듯 절벽처럼 서 있는 여러 봉우리들이 계절에 따라 단풍과 운무, 설경 등 각양각색 풍광을 연출해내니 마치 태고의 신비를 목도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 수직의 연봉 속에 현재 알려진 것만 모두 6개에 달하는 큰 동굴(대금굴, 환선굴, 관음굴 등)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으니 '태고의 신비', '억겁의 신비'라는 말이 결코 덕항산을 치장하기 위해 만들어 낸 수사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덕항산은 행정구역상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와 태백시 삼수동 하사미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해발 표고는 1071m.
앞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산'이라고 얘기했듯이 병풍 처럼 둘러처진 가파른 산을 오르는 코스이기에 가벼이 볼 수 없다. 삼척쪽에서 등산이 시작되는 환선굴 매표소가 해발 280m 지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덕항산은 거의 800m를 쉼 없이 올라가야 하는 산이다. 땀 꽤나 흘려야하지만, 기암괴석 준봉과 동굴 명소 들이 곳곳에 분포, 눈만 돌리면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경치를 만날 수 있기에 결코 지루하거나 마냥 힙겹지는 않다.
동굴도시 삼척이 자랑하는 ‘환선굴’과 ‘대금굴’도 산 자락에 함께 자리잡고 있고, 아직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미개방 동굴도 많아 덕항산 일원 대이동굴지대는 천연기념물 178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덕항산은 또한 화전민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德項山’이라는 이름도 옛날 먹거리가 부족해 한평의 경작지가 아쉬웠던 때 삼척지역 사람들이 이 산을 넘어가면 화전(火田)을 할 수 있는 평평한 땅이 많아 ‘덕을 봤다는 의미에서 덕메기 산’으로 불리웠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유래했다. 등산로 입구에서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는 ‘삼척 대이리 너와집(제221호)’과 ‘통방아(제222호)’도 만날 수 있다.
덕항산이 자리잡고 있는 대이리 마을은 6·25 전쟁이 발발한 것도 모르고 지나갔다고 하는 깊은 산골짜기 마을이다. 삼척시-태백시를 연결하는 국도 38호선을 타고 가다 신기면 소재지에서 15분 정도를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정말 외부로 통하는 길도 변변치 않은 말그대로 심산유곡이었으나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환선굴과 관음굴 등 거대한 동굴들이 잇따라 개방되면서 요즘은 관광차량이 줄지어 찾는 동굴 관광지로 변신했다.
산행은 태백시 쪽에서도 할 수 있지만, 삼척쪽에서 오르는 산행은 신기면 대이동굴 입구에서 시작된다.
등산로 입구인 골말에서부터 발을 떼 환선굴전망대∼장암목∼쉼터∼덕항산∼지각산(환선봉)∼자암재∼약수터∼천연동굴전망대∼골말로 다시 돌아오는 일주 코스가 총 6.9㎞.
산행은 역순으로 해도 무방하다.
(중요민속자료 제222호. 삼척 대이리 통방아. 1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등산로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11월의 첫날 찾아간 덕항산은 늦가을과 이제 막 찾아온 초겨울이 교차하는 곳 이었다.
6-7부 능선 아래는 단풍, 또 단풍의 물결이 극찬사를 연발하게 했고, 정상 부근에는 이미 나뭇잎을 모두 털어내고 가장 겸허한 나목의 자세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의 채비가 분주했다.
골말 입구에서 덕항산 정상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약 2시간 정도.
산행 거리는 총 2.3km에 불과하지만, 시종 가파른 산길을 타고 올라야 하기에 웬만한 산의 이동거리보다 2배는 소요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등산로의 경사도가 심하다는 것이다. 8부 능선 쯤에 도달할 때 까지는 거의 쉼없이 '깔딱고개'를 연속적으로 오르는 등산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약 20번은 오른 등산로.
11월의 첫날에 골말 등산로 입구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오늘도 땀 깨나 뺄 것"이라고 산행 의지를 불태웠지만, '동산 고뎅이'까지 이동하는 500m 구간은 역시 헉-헉- 가뿐 숨이 그치지 않는다.
'고뎅이'는 삼척 사투리로 경사가 급한 언덕을 뜻하는데, 덕항산 등산로는 처음부터 고뎅이 수준을 뛰어 넘는다.
(처음부터 로프 등 지지대를 붙잡고 올라야 하는 가파른 등산로가 계속 이어진다)
(덕항산의 화려한 단풍 물결. 산 중턱에 환선굴과 그곳으로 오르는 모노레일이 보인다)
그러나 동산 고뎅이에 올라 바라보는 덕항산의 단풍은 명불허전, 그대로였다.
아예 단풍에 취해 한동안 더 오르는 것을 잊었을 정도니 덕항산의 단풍은 그 어떤 유혹보다도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등산로는 가파르지만, 단풍 또한 이를데 없이 화려하다. 곱게 물든 단풍이 산행의 힘을 북돋는 에너지가 된다)
그 뒤로도 8-9부 능선까지 가파른 산행은 계속 이어진다.
산행 막바지에 '926계단'을 만나게 되는데, 계단 숫자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926계단이 시작됐다면, 그것은 덕항산 정상이 머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926계단은 처음에는 다소 가파르게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산 허리를 빙 돌아가는 형태로 설치돼 있기 때문에 크게 힘든 구간은 아니다.
(926계단의 끝 지점. 2년 전 태풍에 부서진 철계단이 형태만 갖춘 채 임시복구돼 있다. 덕항산의 철계단은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1시간40여분 동안 땀을 뺀 뒤 덕항산 정상에 오르니 '백두대간' 표지가 선명하다.
정상은 백두대간 종주 코스에 자리잡고 있다.
계곡과 산 7부 능선까지를 온통 물들였던 단풍도 정상에 오르니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완전히 다른 풍경화가 펼쳐졌다. 등산로에 낙옆이 수북하고, 나무들은 가지가 선명하니 이곳은 벌써 초겨울에 접어든 모양새다.
(덕항산 정상 부근의 쉼터. 정상에 올랐던 등산객들은 하산을 위해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덕항산 능선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 이기도 하다)
(쉼터에 서 있는 이정표)
(백두대간 종주 코스인 덕항산 능선 등산로 태백시 쪽인 서쪽은 다소 완만한 반면, 삼척시 쪽인 동쪽은 오르기 힘든 만큼 가파른 수직 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이 때문에 능선 종주 중 도처에 이런 낭떠러지 표시가 있다. 겨울 등산시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안전 로프 쪽으로 너무 바짝 다가서지 않으면 된다)
(덕항산 능선의 중감 지점에 있는 환선봉(지각산). 해발 1080m니까 이곳이 덕항산 정상보다 오히려 높다. 동쪽으로 대이동굴 지대를 굽어볼 수 있는 전망터가 자리잡고 있다)
(덕항산 능선 등산로에서 만나는 다양한 풍경. 1000m 이상 고지대지만, 마치 뒷산을 걷는 것 처럼 푸근하다)
(환선굴 방향으로 하산하는 지점의 이정표)
덕항산 정상∼지각산(환선봉)∼자암재 사이 약 3㎞는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코스이기에 비교적 편안한 산행이다. 중간에 지각산(환선봉·1085m) 오르막 코스가 있기는 하지만, 잠깐 동안의 수고로도 오를 수 있기에 힘을 뺄 만한 곳은 아니다.
자암재에서 환선굴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본격적인 하산길이 시작된다.
하산중 몇곳의 전망대에서 다시 바라 본 덕항산 경치와 단풍은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줄 만큼 황홀했다. 아침에 비교적 화창했던 날씨가 오후에 들어서면서 흐려져 정상 부근으로 가벼운 운무가 덮히니 가뜩이나 신비한 산세에 경외감마저 깃든다.
하산길에는 목을 축일 수 있는 약수도 만날 수 있고, 천연둥굴을 통과하는 이색 체험도 하게 된다.
산 가운데가 뻥 뚫려 길이 30여m의 큰 둥굴이 만들어져 있는데, 등산로가 그곳을 지나가게 돼 있는 것이다. 동굴의 규모도 작지 않으니 역시 덕항산은 '동굴의 산'이라는 것도 실감하게 된다.
(하산길에는 더욱 다양한 풍경을 만단다. 곳곳에 돌출된 전망대에서 덕항산의 신비를 더욱 가깝게 구경할 수 있는가 하면, 단풍 숲길의 운치를 제대로 즐기면서 샘터에서 목을 축을 수도 있다. 천연동굴을 통과하는 것도 덕항산의 큰 매력이다)
(이제 다 내려왔다. 등산로 계단을 빠져 나오니 환선굴 관광 계단이 우측으로 나 있다)
(환선굴에서 쏟아지는 물 줄기가 예쁜 폭포를 이뤘다. 환선굴은 동굴 안에 정말 물이 많다)
등산코스: 골말(등산로 입구)∼환선굴 전망대∼장암목∼쉼터∼덕항산∼지각산(환선봉)∼자암재∼약수터∼천연동굴전망대∼골말 (6.9㎞, 5시간) ※골말 쪽에서 덕항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보수 정비를 위해 현재는 폐쇄된 구간임. 따라서 일반 등산은 환선굴 쪽에서 덕항산을 오르는 것만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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