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대산을 다녀왔다.
여름 다 지나간 뒤에 시간을 낸 3박4일간의 휴가.
집에서 잠이나 자기에는 너무 아까워 어디로 깔까, 생각 끝에 오대산으로 정했다.
지난 4월에 친구들과 갔다가 '입산통제' 때문에 적멸보궁까지만 보고 온 아쉬움도 있기에 오대산이 더욱 땡겼다.
'오대성지' 월정사를 지나 산행 들머리인 상원사에 도착하니 시간이 오전 11시45분.
오늘은 2013년 9월4일이니까 근 5개월만에 다시 상원사에 찾아온 것이다.
홀로 산행에 나서는 것이 조금 외롭기는 하지만, 오늘은 입산통제 없이 산행이 무한정 허용되니 신발끈 동여 맨 발걸음이 솜털 처럼 가볍다.
산행코스는 상원사-중대사자암-적멸보궁-비로봉-상왕봉을 거쳐 다시 현 위치로 돌아오는 11.9km 코스.
오대산 정상 비로봉 까지는 예전에 두번 오른 적이 있지만, 상왕봉까지 능선을 돌아오는 코스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초행길 처럼 설렌다.
(문수보살 성지인 상원사 가람과 국보 36호인 동종. 국보는 유리벽 안에 있고, 옆에 똑 같은 종을 만들어 놓았다.)
오대산은 역시 불법(佛法)의 성지.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국보 36호 동종(銅鐘)으로 유명한 상원사(上院寺)와 만나다.
'오대광명-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이 맑아지고, 생각이 밝아지고, 좋은 인연을 만나고, 부처님의 가피로 소원이 이루어진다' 글씨가 나붙은 사천왕문을 지나 상원사 경내에 들어서니 사천왕문 옆에 딸린 두개의 방이 먼저 눈길을 끈다.
'화로방(話老房)-이야기가 익어가는 방'과 '이매일(怡每日)-몸과 마음이 기뻐지는 곳' 이다.
글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선계의 귀인을 만는 듯 세속의 스트레스에 찌든 머리와 마음에 고요한 울림으로 다가 선다.
사실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가 중심사찰로 자리잡고 있는 오대산은 불가에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기거하는 산으로 유명하고, 상원사는 적멸보궁과 함께 그 핵심인 문수 성지로 통한다.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입구 왼편 길 옆에 서 있는 관대걸이. 세조 임금과 상원사가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길 옆 노란색 건물은 등산, 관광객들이 간단한 요기를 겸해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이다.)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상원사 문수보살에 얽힌 얘기는 더욱 유명하다.
전해져오는 스토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꿈에 어느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세조에게는 형수)가 나타나 침을 뱉는다. 그 뒤 세조는 몸 여기저기에 피부병이 번진다(사실 역사에서도 세조는 말년에 종창 부스럼으로 매우 고생한 임금으로 기록돼 있다)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각지의 온천을 찾아다니던 세조가 어느날 상원사에 들러 산간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게 되는데, 그 때 문수보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물리치고, 목욕을 하던 세조가 등을 밀고 싶어 두리번거리던 중에 한 동자승을 발견, 등을 밀어달라고 하는데 그 일을 마친 뒤 세조가 동자승에게 "어디가서 임금의 옥체를 씻어줬다고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하자 동자승이 "대왕께서도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는 요지다.
세조 임금과 상원사의 깊은 인연은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오르는 입구, 길옆 왼편에 있는 '관대걸이'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 관대걸이는 세조 임금이 목욕을 할 때 벗어놓은 의관을 걸었다고 하는 유물이다.
(중대사자암.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증간 쯤에 자리잡고 있다)
(중대사자암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 한창 돌을 까는 등의 길 공사가 진행중 이었다.)
각설하고, 상원사를 벗어나면 곧바로 적멸보궁 가는 산길이 기다린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까지는 대략 1.5km 정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이지만, 제법 경사가 있는 비탈길로 이어진다.
상원사-적멸보궁 중간 쯤, 산 비탈면 계곡에 계단형으로 절집이 지어진 중대사자암을 만나는 것도 오대산 등산의 즐거움이다. 등산객과 불자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식수대 시설도 잘 만들어져 있다.
다시 중대사장암에서 적멸보궁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길옆 석등 속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은은하게 염불 소리가 흘러 나오는 것을 듣게 되는데, 종교를 떠나 깊은 산 소나무 숲에 흘러 퍼지는 그 잔잔한 음률이 산행을 더없이 편안하게 한다.
곧 이어 만나게 되는 명소는 오대산 최고의 성지 적멸보궁.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 답게 사람의 몸가짐과 마음을 저절로 경건하게 하는 분위기부터 압권이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으로 통한다.
그래서 보궁 법당에 불상이 없고, 불단만 설치돼 있는 것이 특징적이고, 보궁 뒤편에 마애불탑이 서 있다.
오대산 비로봉에서 흘러 내린 주변의 산이 모두 적멸보궁을 감싸고, 알현하는 듯한 자리여서 천하의 명당으로 꼽힌다.
비로봉을 정점으로 다섯 봉우리가 연꽃 모양의 형태로 띠고 있다는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기거하는 상원사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대(관음암), 서대(수정암), 남대(지장암), 북대(미륵암), 중대(사자암) 등 다섯대에 암자가 배치돼 있다.
그래서 산 이름도 오대산인 것이다.
오대산의 중심 사찰인 월정사는 팔각구층탑(국보 제48호)을 비롯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고,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史庫)'가 또한 이곳 오대산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오대산 적멸보궁. 진신사리를 모셨기에 보궁안 법당에 불상이 없고, 불단만 설치돼 있다)
적멸보궁에서 오체투지 삼배로 마음을 다스린 뒤 다시 등산로로 접어들면 이제는 정말 된비알 비탈길이 기다리고 있다.
비로봉 정상까지 약 1.2km 정도를 거의 계단만 밟고 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고산 등산로 치고는 아주 긴 거리는 아닌데다 국립공원 답게 이정표가 잘 돼 있어 조금 오르면 800m, 500m, 300m 식으로 비로봉까지 거리가 계속 줄어드니, 그 거리를 세면서 올라가는 재미도 제법 있다.
그러나 비로봉 정상에 접근하기 300m 전 쯤 부터는 정말 경사가 심해 '헉 헉' 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온다.
(적멸보궁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각종 계단길. 1.2km 정도를 계속 이런 비탈면의 계단 길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9월4일 오후 1시20분, 비로봉 정상(해발 1563m)은 정말 화창했다.
과거에 다녀 간 두번 모두 날씨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서쪽 하늘이 유난히 맑아 흰구름에 파란 물감을 칠해 놓은 것 같은 하늘이 눈부시기 이를데 없었고, 동쪽도 멀리 강릉 주문진 시내와 노인봉, 선자령 풍력발전단지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쾌한 백두대간, 겹겹의 능선을 굽어보는 맛은 강원도 산하가 주는 큰 매력이면서 활력소다.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 날씨가 화창해 원,근경이 모두 일품이었다)
이곳저곳 사진을 찍으며 10여분을 쉰 뒤 다시 동쪽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상왕봉으로 가는 길이다.
비로봉까지 등산로는 서너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될 정도로 넓었으나 상왕봉으로 가는 능선 길은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다. 길 옆에 고개를 내민 야생화가 혹여 내 발걸음에 상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길이 좁다.
그래도 고산의 능선을 타는 재미는 산을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흥겹기 이를데 없다. 봄볕은 며느리가, 가을 볕은 딸이 쬐도록 한다고 했던가. 따사롭기 그지없는 그 가을 햇살을 맞으면서, 또 끝없이 펼쳐지는 고산준령을 굽어보면서 키 작은 나무 사이로 난 좁은 등산로를 다람쥐 처럼 오르락내리락 걷는 즐거움은 산행의 백미라 할만하다.
(비로봉에서 상왕봉 가는 능선길. 고산지대인데도 마치 뒷동산 숲길 처럼 정겹다)
(상왕봉 가는 길에 만난 고목들. 수백년 세월의 풍상을 견딘 끈질긴 생명력을 실감케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하는 주목은 태백산이나 정산 가리왕산 등지에만 많은 줄 알았는데, 오대산에도 군락을 이뤄 서식하면서 보호되고 있었다)
비로봉에서 2.3km를 이동하니 상왕봉(해발 1491m)이다.
5리가 넘는 긴 제법 긴 산길이지만, 심하게 오르거나 내려가는 곳이 없이 거의 평탄하게 이어진 코스이기에 30-40분 정도면 누구나 무난하게 이동할 수 있다.
도중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하는 주목 군락지도 보게 되고, 거대한 고목의 군상도 여럿 만나게 되니 깊은 산, 높은 산 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멧돼지가 등산로 곳곳을 파헤친 흔적도 많다.
비로봉이나 상왕봉 모두 제법 넓은 터로 이뤄져 있지만, 햇볕이 강한 여름철에는 오래 머물기 힘들 것 같다.
대신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이동하는 능선 중간중간 솦속에 여러사람이 어울려 요기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몇군데 있으니 일행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은 그런 장소를 찾는 것이 좋다.
상왕봉에서 0.8km를 더 이동하면, 두로봉으로 계속 능선을 타는 코스와 상원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나는 북대 미륵암과 상원사주차장으로 향하는 코스를 잡아 내려왔다.
그런데 계속 깊은 숲길인줄 알았는데, 1km 정도를 내려오니 비포장 도로가 나타났다. 상원사에서 북대 미륵암 등지로 용품을 옮기는 차량이나 국립공원 관리 차량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길 같았다.
산 굽이를 길게 몇굽이 돌면서 이어진 4.7km 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더니 내가 처음 출발했던 상원사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장 도착 시간은 오후 3시45분. 상원사-적멸보궁-비로봉-상왕봉-상원사 11.9km 이동에 4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 4시간 동안 나는 문수보살이 사는 '오대 성지'가 주는 힐링 에너지를 마음껏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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