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동해(東海), 평화의 바다에 핀 교린의 끈- 표류민

좋은산 2013. 9. 1. 22:09

(지난 2007년, 일본 대마도와 하카타-시마네-돗토리현 등지를 취재하고 강원도민일보에 보도한 표류민 특집)

 

 동해를 사이에 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표류·표착이 발생한다. 인적교류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표류·표착은 두 지역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이들은 단순한 조난자들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이 해외여행을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던 때, 그들은 외국을 구경하고 경험한 흔치않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표착지에 전해 준 정보와 표착지에서 보고들은 정보는 양국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교린(交隣)의 끈이 이들로부터 연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조선 표류민 관련 자료가 적혀 있는 고문서(현립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소장). '귀국 강원도 평해'라는 기록이 선명하다.

 

  <표류의 역사적 배경>

 고려시대 동여진족 해구와 왜구들이 횡행하던 때처럼 바다가 불안하던 때는 일반인들의 바다 진출이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어 표류·표착의 기록 또한 극소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록보다는 유물·유적으로 그 흔적을 가늠하는 경우가 더 많다.

 때문에 역사에서 표류·표착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 이후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바다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해적들의 발호로 해안 백성들이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하자 조선 조정은 세종 즉위년인 1419년 6월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를 수장으로 군사 1만7385명에 병선 227척을 동원, 역사에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부르는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다.

 대마도는 산이 많고 농토가 척박해 거주민들이 기근을 면키 어려운 곳. 정벌에다 통교(무역)제한 조치로 경제적 궁핍이 심화되자 당시 대마도주는 신하를 칭하면서 지속적으로 조선에 통교를 간청하고, 이후 세종8년(1426년)에는 삼포(부산포 여포 제포)가 개항돼 왜인들의 통교 무역이 확대됐다.

 물론 이후에도 노략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일련의 강·온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해안지역의 민심과 바닷길이 눈에띄게 안정되자 면역(免役)을 위한 도주 등 비정상적 일탈이 아닌 어업, 조운, 상업 등 생업을 위한 바다 진출 또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해진다.

 특히 전국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뱃길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은 조선 초기 왕권의 안정을 위한 재원확보와 직결되는 중대사이기도 했다.

 세종실록에는 "조운선이 (해난사고 등을 당해) 파손될 때는 표착지 수령이 상황을 살펴 옷과 양식을 조달해 지급해 구제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를 어길때는 처벌토록 한 내용도 있다.  조선이 뱃길의 안전과 해안지역에서 조운인력 확보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조운이나 어업, 상업 등에 종사하다 해난사고를 당한 선원들은 우리 동해 연안에 표착할 수도 있었지만, 조류를 타고 바다 건너 서일본 해안에 흘러드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해난사고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이훈 연구위원이 '조선시대 조·일(朝·日)간 표류민 송환과 교린' 논문에서 밝힌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0척 이상 수십척씩 조운선이 침몰·파손된 해난사고도 임진왜란 이전까지 10여차례가 넘는 것으로 파악돼 있다. 규모가 큰 조운선이 해난사고를 당하는 일이 이처럼 빈발했다면 어선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통신사 이동과 표류민 송환 등에 통로 역할을 한 대마도 중심 이즈하라 항구의 전경.

 

 <일본으로 간 표류민 규모>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부터 1872년까지 일본열도에 표류해 간 조선인이 표착건수로는 971건, 표류민 수로는 977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273년 동안에 무려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바다 건너 일본 해안에 표착한 것이니 당시 바다 진출의 규모를 미루어 실감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포함하면 수천명 이상이 더 늘어날 가능성도 높다.

 표류민과 조선교류사 등을 연구해 온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오오모리 키미요시(大森公善) 관장은 "일본에 표류해온 조선인들은 모두 나가사키(長崎)∼대마도를 거쳐 송환됐는데, 에도바쿠후 (江戶幕府·1603년∼1867년)시대를 관통하면서 끊이지 않았고, 표착지는 서일본 해안 곳곳이었다"고 강조했다.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1600년대 이후 일본에 표착한 강원도 출신 표류민 기록만도 수십건에 달한다.

 1751년∼1800년 50년간의 표착 사실을 기록한 '대마역사민속자료관보'에도 대마도에 표착한 조선인 표류민 가운데 14명이 평해·삼척·울진·강릉 등 강원도 출신으로 조사되고 있고, 1799년 11월 5일에는 강원도 삼척의 거주민 8명이 대마도에 표착했다는 구체적 기록도 보인다.

 강원도 출신 표류민들은 어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상인들도 끼어 있었다.

 

 <교린의 끈, 표류민>

 1819년 1월7일 일본 돗토리(鳥取)현에는 12명의 강원도 평해(현재의 경북 울진군 평해) 출신 상인들이 표착하는 떠들썩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항해중 태풍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바다 건너 일본땅에 표착하게 된 이들 12명은 당시 돗토리현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조선으로 송환된다.

 이들의 표착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과 안의기(安義基) 선장이 나가사키를 통해 조선으로 송환될 때 호송을 맡은 관리에게 준 감사편지 등이 지금도 돗토리현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고, 돗토리현은 지금 강원도와 국제자매결연을 맺고 있으니 표류민으로부터 비롯된 선린의 뿌리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마도가 조선으로 통하는 유일한 교류 통로였던 당시 일본 각지의 번(藩)들은 이들 표류민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적지않은 정보를 취득했다.

 규슈 남부 사츠마(薩摩)번에서는 아예 조선어를 할 줄 아는 관리를 두었고, 표류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습득한 조선 정보를 기록, '표민대화(漂民對話)'라는 책을 만들어 냈다.

 또 시모노세키 주변 나카토(長門)번에서도 18세기 중반 표류 조선인들을 통해 취득한 정보를 토대로 '조선물어(朝鮮物語)'를 간행, 조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도 했다. 대마시 교육위원회 문화재과 오노우에 히로카주(尾上博一) 주임은 "조선통신사와 함께 조선후기에 대마도를 교류 통로로 바다를 오간 표류민들은 교린(交隣) 외교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오오모리 키미요시 대마역사민속자료관장 인터뷰>

 "표류민 처리는 선린 우호에 큰 기여를 했다고 봐야 합니다. 예외없이 거의 모든 표류민이 송환됐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교린에 큰 이정표를 세운 것이지요."

 표류민·교류사 등을 연구한 오오모리 키미요시(大森公善) 대마역사민속자료관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패권을 잡은 에도(江戶)시대 이후만 봐도 무려 1만여명의 조선인 표류자가 일본에 표착하는데, 서일본 해안 전역에 표류민들이 족적을 남겼다"며 "이들 표류민들이 체재중에 불편이 없도록 후대하고 본국 송환에 신경을 쓴 점은 일본과 조선이 다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의 조선 표류도 많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에도시대 250여년간 1200여명이 조선 해안에 표착한 것으로 나와 있으므로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의 10분의 1 규모"라고 말했다.

 이 차이에 대해 오오모리 관장은 "아마도 일본열도 쪽으로 부는 계절풍과 조류 등에 의해 조난시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 오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조선후기, 에도시대에 표류민들이 특히 많이 발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막부가 전국을 강력히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해 해적들이 더 이상 발호할 수 없게 되자 일반인들의 바다 진출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