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현지 취재 후 강원도민일보에 보도한 내용>
봉행무사(奉行武士) 강씨(岡氏)에게 올립니다.
"우리들의 신세가 길하지 못한 연고로 큰 바다 한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꼬박 십여일을 보내고 일본국에 표류해 생명을 구하게 됐습니다. 우리들은 태산 같이 높고, 바다 같이 깊은 은혜를 입음으로써 살아났습니다. 귀국(歸國)을 위해 나가사키로 호송되는 길에도 봉행무사 십여인과 따르는 사람들이 바다 위에서 같이 머물고 같이 잠자니 동기나 친형제와 다름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귀국하는 마음을 알 듯 하지만, 또한 모를 것입니다. 한번 만리 밖으로 헤어지면 어찌 서로 또 볼 수 있겠습니까. 봉행무사께서는 하늘이 명해준바 천수와 복을 누리면서 평생토록 잘 지내시고, 자손들도 편안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엎드려 바랍니다. 슬프기 그지없어 통곡하는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조선국 안의기(安義基) 씀."
위 편지는 188년 전 조선의 한 선장이 일본 돗토리(鳥取) 번(藩)의 관리에게 보낸 감사장이다.
편지의 주인은 강원도 평해 출신 안의기 선장. 수신자는 돗토리의 관리 오카 킨에몬(岡金右衙門)이다.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걸까.
사연을 알아보려면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1819년 일본 돗토리 번으로 돌아가야 한다. 현재 돗토리현립도서관 관계자의 설명 및 관련자료를 토대로 그들의 인연을 더듬어본다.
1819년 1월 11일(음력) 오후 2시 일본 돗토리 번의 아카사키(赤崎) 근해에 1척의 정체모를 조난선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아카사키 사무소의 순찰선이 발견한다.
이튿날 인근 야바세(八橋)라는 곳에 표착한 조난선(길이 15∼16m)에는 조선인 12명이 타고 있었다.
상선으로 보이는 배에는 말린 정어리가 있었고, 표착민들은 조선의 화폐인 상평통보에다 칼, 부채, 항아리, 옷 등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를 물었더니 손으로 22세부터 60세까지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이들 12명은 돗토리번으로부터 보호민으로 지정돼 야바세의 빈집에 약 열흘간 머문 뒤 1월 22일에 야바세를 출발해 육로로 이동, 이틀뒤인 24일 돗토리에 도착한다.
돗토리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마주하고 있는 곳 이기는 하지만, 그 지리적 위치 떄문에 야마구치나 시마네현 등지 처럼 표착민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돗토리현립도서관 관계자에 따르면 1599∼1872년 에도(江戶)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돗토리번 사람이 한반도에 표착한 것은 단 두번뿐이었고, 조선 사람이 돗토리번에 표착한 것도 1819년 안의기 선장 일행의 표착을 포함해 1767년(경상도 장발 출신 어민 4명)과 1838년(울산 출신 소금상인 5명) 3번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이국의 조선 사람을 보는 것은 평생에 한번 만날까말까하는 구경거리였다. "무슨 일이냐"며 구경꾼들이 쏟아져 나와 번의 중심가 일대가 떠들썩했다.
표류민들을 번으로 호송하는 행렬도 요란했다. 돗토리번에서는 이들 조선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모두 100여명의 경호 인력을 붙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성(城) 주변의 주민들에게는 깨끗이 거리 청소를 하도록 하는 한편 길가의 집들은 병풍과 미술품으로 장식을 하도록 하기도 했다.
돗토리 번 문헌에는 안 선장 일행이 이를 보고 'ちようた∼좋다'를 연발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성대하게 안의기 선장 일행을 맞아들인 돗토리 번은 성 주변의 중심가 정회소(町會所)에 안 선장 일행 12명의 거처를 마련한다. 안 선장 일행은 이곳에서 그해 4월 8일까지 체류한다. 1월 12일 야바세(八橋)에 표착한 시점부터 이들이 돗토리 번에 머문 기간은 약 4개월이다. 1월∼4월까지 3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4개월이 되는 것은 그해가 음력으로 윤달이 든 해기 때문이다.
돗토리 번은 조선 표류민 12명에게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대접했다. 죽과 밥을 비롯해 절임 음식 등이 제공됐는데, 표류에 지친 안 선장 일행은 굉장히 많은 양을 먹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의사도 1명 배치해 건강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런데 표류민이 머문지 3개월 20일쯤이 흘렀을 때 예기치 않았던 변고가 발생한다. 안 선장 일행이 기거하던 정회소 일대에 심야에 불이 난 것. 돗토리현립박물관 관계자는 "당시 민가의 피해도 막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굉장히 큰 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예기치 않았던 사태에 깜짝 놀란 돗토리 번에서는 한밤에 안의기 선장 일행 '구출작전'을 벌인다. 가마에 안 선장 등을 태우고 불타는 거리를 빠져 나오는 그림이 현재 돗토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불이 나자 안 선장 등 조선 표류민들을 안전지대로 급히 옮기는 모습. 가마에 탄 사람은 안 선장으로 보인다)
그들이 머문 4개월 간 돗토리 번과 에도 바쿠후(幕府) 사이에는 전령들이 오간다.
표착민 발생을 바쿠후에 보고하고 지시를 전하는 전령들 이었다. 드디어 바쿠후로부터 "돗토리에서 바닷길로 나가사키(長崎)에 보낸뒤 그곳에서 나가사키의 관리(奉行)에게 넘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음력 윤 4월 8일에 2척의 배에 나눠타고 돗토리 번을 떠난 일행은 악천후를 만나 고생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달포가 지난 5월22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들이 조선 교류의 통로인 대마도 이즈하라(嚴原)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것은 조난 후 9개월이 지난 그해 9월 15일이었다.
<그후>
지금 돗토리 현립 도서관에는 안 선장이 나가사키로 호송될 때 봉행(奉行)을 맡았던 돗토리 번의 관리 오카킨에몬에게 보낸 감사 편지가 보관돼 있다.
또 안 선장 일행 12명이 1819년 음력 1월∼4월(윤달 포함) 돗토리 번에 장기 체류하는 동안 일본 화가가 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도 도서관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감사 편지와 그림은 나중에 모아져 하나의 족자에 보기 쉽게 재구성됐다.
그후 2001년 돗토리현의 가타야마 요시히로 지사는 1819년에 있었던 안의기 선장 등 조선 강원도 선원들과 돗토리현 간의 '아름다운 역사'를 발굴, 다시 세상에 소개했다.
1991년 돗토리 현 총무부장으로 근무하면서 '표류조선인 지도(之圖)'와 만나게 된 가타야마 지사는 안 선장의 후손을 찾는 조사에 착수해 한국 신문에 광고도 내고, 안 선장 일행이 출항했던 울진군 평해읍과 기성면 등지를 찾아다닌 끝에 안 선장의 후손들을 찾아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 4월 교류의 끈을 다시 잇듯이 서울과 돗토리현 요나고 공항에는 직항 노선이 개설됐고, 2002년에는 양양∼요나고 사이에 전세기가 오가기도 했다.
1819년 표류 당시 안 선장 일행의 고향은 강원도였다. '표류 조선인 지도'에는 안 선장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조선국 강원도 평해 고을'이라는 한글 표기가 선명하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인정의 다리를 놓았던 강원도 선원들과 돗토리 현 사람들의 아름다운 교류는 1994년 강원도와 돗토리 현이 국제자매결연을 맺는데 결정적 인연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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