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에 취재해 강원도민일보에 특집으로 보도한 내용)
강원도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조선시대 한 여류 시인이 남긴 빼어난 시(詩)와 목숨보다 진한 그리움을 담은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최근 세인들의 눈물 샘을 자극하고 있다.
스토리의 주인공은 옥봉(玉峰) 이 씨(李氏).
조선 명종 시대에 태어나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선조 시대까지 파란의 역사 현장을 살다 간 여인이다.
그녀가 세인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주옥같은 시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삼척 죽서루는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세의 평가>
옥봉 이씨의 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후세 문인들의 평가가 말해준다.
강릉 출신으로 허난설헌의 동생인 교산 허균(許筠)은 '학산초담'에서 “그녀의 시가 몹시 맑고 강건해 아낙네들이 연지 찍고, 분 바르는 말들이 아니다”고 했다. 허균은 또 ‘성수시화’에서도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 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 시가 청장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고 같은 평을 했다.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난설헌의 동생 허균이 옥봉 이씨의 시를 누님에 견주어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의 한사람인 신흠(申欽)은 ‘청창연담’에서 “근래 규수의 작품으로는 옥봉 이씨의 것이 제일이다.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자는 아직 없었다”고 했고, 홍만종(洪萬宗)은 대표적인 시평서인 ‘소화시평’에서 “(사람들이) 옥봉 이씨를 조선 제일의 여류시인이라고 일컫는다”고 적었다.(허균부터 홍만종까지 평가, 하응백 편저 ‘이옥봉의 몽혼(夢魂)·휴먼앤북스·2009년’에 수록)
도대체 옥봉 이씨의 시가 어떻길래 쟁쟁한 문인들이 한결같이 입에 침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찬사를 보냈던 것일까.
이옥봉의 몽혼’ 책에 실려 소개되고 있는 그녀의 시 ‘추사(秋思·가을생각)’를 한번 살펴보자.
“霜落眞珠樹/關城盡一秋/心情金輦下/形役海天頭/不制傷時漏/難堪去國愁/同將望北極/江山有高樓(진주 나무에 서리 내려 앉으니/ 성(城)은 어느새 익은 가을/마음은 임금 곁에 있으나/몸은 멀리 바닷가 이곳에 있네/상심한 눈물 막을 길 없고/떠나 온 시름 감당키 어렵구나/함께 북녘을 바라보라고/강산에는 누각이 높이 솟아있네)”
이 시에서 마지막 행의 고루(高樓)는 관동팔경 제일루로 일컬어지는 삼척의 ‘죽서루’를 일컫는다.
<강원도-삼척과의 인연>
‘죽서루’와 관련된 시를 읊은 것에서 삼척과 옥봉 이씨의 인연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1544년∼1595년)의 첩이었다. 1583년∼1586년까지 삼척에서 ‘사또’ 생활을 한 남편을 따라 죽서루 누각과 오십천 옆 바윗길을 거닐고, 삼척의 바닷가와 계곡 물길이 엮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즐긴 여인이었던 것이다.
‘죽서루’의 아름다움을 풀어 낸 그녀의 시(죽서루)를 보자.
“강물에 몸 담근 갈매기의 꿈 드넓기 그지없고, 하늘에 든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만 하구나”(江涵鷗夢闊, 天入雁愁長)
옥봉 이씨의 이 작품은 죽서루의 절경을 자신의 인생에 투영하면서 초현실적 상상의 나래를 편 작품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그 아름다움을 예찬했던 죽서루 시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라는 평가가 많다.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영월 땅을 지나는 동안에는 ‘영월도중(寧越道中)’이라는 시를 지어 비운의 임금 단종의 한을 달래기도 했다.
“(중략)슬픈 노래 읊조리다 그치는 곳에 노릉의 구름/이 몸 또한 왕손의 여인이니/이곳 두견새 울음소리 차마 듣기 힘겹구나”(哀歌唱斷魯陵雲/安身亦是王孫女/此地鵑聲不忍聞)
시를 음미하면 할 수록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읊은 그녀의 인생 스토리가 더욱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눈물 없이는 풀어 낼 수 없는 극적인 사랑과 그리움, 비극이 점철돼 있는 그녀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사랑과 인생 스토리>.
그녀는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봉은 선조 임금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이기에 앞의 ‘영월도중’ 시에서 본인이 노래했던 것 처럼 왕손이었지만, 조선시대 첩실의 딸인 서녀로 태어난 만큼 분명히 신분상의 한계가 존재했다.
첫 결혼은 남편이 일찍 죽으면서 실패로 끝났고, 두번째 결혼을 하면서 평생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가 남편 조원이다.
그러나 시문에 뛰어났던 재능이 결국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주위의 권유에 따라 그녀를 첩으로 맞아들이면서 조원은 “사대부를 욕 보이는 시작(詩作)을 해서는 안된다”는 맹세를 받았으나 그녀가 마을 사람의 송사에 관련된 글을 써 줘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처하자 결국 그녀를 내치고 만다.
당대의 명사였던 조원의 첩으로 행복한 일상을 누리던 옥봉 이씨가 버림을 받은 뒤 심정과 사랑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그녀의 시 몽혼(‘夢魂)’에 잘 나타나 있다.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요사이 우리 님은 어찌 지내실꼬/ 달 밝은 창가에서 님 생각에 한이 많아/ 님 그려 오가는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님의 집 앞 돌길이 반쯤은 모래로 변했을 것을)"
집 앞의 돌 길이 절반은 모래가 될 정도로 꿈 속에서나마 조원을 연모했던 옥봉 이씨는 임진왜란 중 절개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발행된 ‘조선 여인의 향기·이수광 지음·미루북스’ 책에는 옥봉 이씨의 이후 행적이 잘 소개돼 있다.
내용에 따르면 옥봉 이씨는 조원을 사모하다 자신이 지은 시(詩)를 모두 적어 기름 먹인 한지를 몸에 겹겹이 감고 바다에 투신한 뒤 중국 명나라 산동 지방의 해안에 떠밀려간다. 참혹한 시신이 바닷가에 떠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관리가 건져올리자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쓰여 진 한지와 함께 그 속에 빼곡이 기록된 시가 나타난다. 시를 읽고 감명을 받은 관리는 ‘이옥봉 시집’을 만들어 보관하다가 몇년 뒤 사신 일행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되자 접반사 중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승지 벼슬을 지낸 조원이라는 사람을 아냐”고 물어 “바로 저희 아버님”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죽음과 함께 사라졌던 옥봉 이 씨의 통곡 같은 러브스토리가 세상에 다시 드러나는 순간도 그녀의 인생 만큼이나 드라마틱했던 것이다.
그녀의 시는 조원의 후손들이 남긴 ‘가림세고’와 ‘문소만록’, ‘일사유사’ 등에 전하고, 중국 명나라 때 시선집에도 허난설헌의 시와 함께 소개되고 있다.
옥봉 이 씨가 사랑했고, 또 그 사랑이 서려있는 삼척지역에서 재조명을 하고, 그 사랑을 스토리텔링으로 들여주면서 죽서루에 시비라도 세운다면 어떨까?
<삼척부사 조원은 누구인가>
1564년, 21세의 나이로 진사과에서 장원을 한 수재다. 이때 율곡 이이 선생은 생원과 장원을 했다.
장원을 한 수재답게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쳤다. 33세에 이조좌랑을 지낸 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괴산현감과 삼척부사, 성주목사를 차례로 지내면서 복귀한다. 삼척부사를 지낸 것은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583년부터 1586년까지이다.
48세 때인 1591년, 임진왜란이 나기 1년 전에 사헌부 집의가 되고, 50세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네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철원으로 피난을 가다가 왜적에게 쫓기게 되자 위로 두 아들이 맞서 싸워 목숨을 잃으면서 어머니를 구했다. 전란이 끝나자 선조 임금이 죽은 조원의 두 아들을 기리는 쌍홍문을 세우도록 했으니 그것이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의 유래가 됐다.
.
'역사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해(東海), 평화의 바다에 핀 교린의 끈- 표류민 (0) | 2013.09.01 |
---|---|
강릉 대관령 '원울이재' 현위치 아니다 (0) | 2013.08.30 |
200년 전 일본 돗토리현에 표류한 강원도 선원들 (0) | 2013.08.30 |
독도와 동해(東海) (0) | 2013.08.29 |
추신구라 이야기 2 (0) | 2013.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