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설악산 공룡능선을 넘었다.
언젠가는 꼭 내 두발로 넘고 말겠다고 벼르고벼르던 로망을 실현해 낸 것이다.
공룡능선을 넘기 위해 걸어야 하는 산행 거리는 어느 코스로 가든 20km이다. 무려 50리에 달하는 험준한 산길을 걸어야 하니 산 좀 탄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루 낮 동안에 주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지난 5월에 한번 시도를 했다가 중간에 되돌아왔던 아픔이 있다.
그래서 한달뒤인 지난 6월말에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다시 도전길에 올랐다.
그것도 혼자 단독 산행으로.
나홀로 산행은 외로운데다 위급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생각을 조용히 정리할 수 있고, 중간에 되돌아오든, 강행하든 혼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그날도 나는 출발시간이 너무 늦었다.
산행 들머리인 속초시의 설악산국립공원 소공원에 도착하니 시계가 벌써 10시30분을 가리켰다.
아뿔싸, 지난 5월에 중간에 돌아왔을 때 보다 1시간 정도가 더 늦은 시간이다.
에이 모르겠다.
해가 진다고 해도 랜턴 불빛으로 한번 시도해보지 뭐.
오늘 코스는 설악산 입구 소공원-비선대-천불동계곡-양폭대피소-희운각대피소(무너미고개)-공룡능선-마등령-비선대-소공원까지 20km다.
지난 5월에는 소공원-비선대-마등령(6,5km) 코스를 잡았다가 마등령 정상(해발 1320m)에서 결국 돌아서고 만 경험이 있기에 오늘은 희운각대피소 쪽으로 거꾸로 도는 산행길을 선택했다.
아예 중간에 돌아올 마음을 없애 버리자는 심사였다.
비선대를 지나 천불동 계곡에 들어서니 "아 역시 설악이구나"하는 탄성이 절로 난다. 1980년대 대학 시절에 오색에서 대청봉을 넘으면서 한번 들어섰던 계곡이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거억도 가물가물, 초행길이나 마찬가지다.
(비선대: 마등령과 희운각(천불동) 방면의 등산로가 갈리는 지점이다. 어느쪽 길로 올라 가든 공룡능선을 만나게 된다. 비선대까지가 산책이었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희운각 방면은 마등령 쪽보다 오르는 길이 다소 멀지만, 경사는 상대적으로 덜하고, 마등령은 쪽은 처음부터 급경사 돌계단 산행이 2시간 넘게 이어진다. 어느쪽으로 오르든 대청봉 쪽으로 넘어가지 않는한 공룡능선 산행을 마친 뒤에는 다시 비선대로 돌아오게 된다. 비선대는 그야말로 공룡능선으로 향하는 산객들이 어김없이 거쳐가는 나들목 요충지인 것이다)
(천불동 계곡의 절경 앞에서 홀린듯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천불동 계곡에서 양폭대피소까지 길게 이어지는 계곡의 계단길. 군데군데 보수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다소 어수선하기는 했으나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니다)
소공원 주차장에서 비선대- 천불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약 5-6km에 걸쳐 하염없이 길게 이어지지만, 급경사는 아니고 완만한 경사가 흥취에 젖을 만해 초보자도 양폭대피소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양폭을 지나면서 부터는 된비알 오르막이다.
이제부터는 땀 깨나 뺄 각오를 해야한다.
헉헉대고 희운각대피소 직전 무너미 고개에 오르니 대청봉 쪽에서 넘어 오는 사람, 이제 막 공룡능선을 빠져나온 사람들 수십명이 뒤섞여 장을 이뤘다.
현재 시간은 오후 1시10분. 10시30분에 소공원을 출발했으니까 8.3km 거리를 2시간40여분만에 걸어온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빠르다. 보통사람들은 3시간-4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막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언제 소공원 주차장에서 출발했냐고 물어 보니 나보다 1시간 정도 다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다.
일부 사람들은 지금 시간은 너무 늦었다고 공룡능선 진입을 포기하는데, 내가 누군가? 오늘 무조건 공룡을 넘겠다고 마음을 다졌는데,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
일부 만류를 뿌리치고 그대로 공룡 등줄기에 첫 발을 들여 놓는다.
공룡능선은 외설악과 내설악을 가르는 분기점 능선으로 희운각대피소-마등령까지 5.1km 구간을 말한다.
능선의 표고는 해발 1000m-1400m 고지로 이어진다.
(공룡능선 초입의 신선봉에서 잠시 쉬면서 대청봉 방향을 올려다 보니 '역시 설악'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신선봉에서 처음 만난 공룡능선의 전경. 처음에는 완전히 구름에 뒤덮여 오늘 공룡의 등을 구경하는 것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구름이 걷히면서 이런 황홀경을 연출해냈다)
공룡의 등 처럼 기암고봉 절경이 쉴새없이 이어진다고 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공룡능선을 경계로 동쪽은 외설악, 서쪽은 내설악이 되니 5.1km 능선을 타면서 내,외설악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천하의 명소다.
능선은 처음부터 급경사 쇠줄 타기로 시작된다.
어, 이거 보통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50여m 쇠줄을 타고 오르니 이제 본격적으로 능선 산행의 묘미가 나를 기다린다.
전망 좋은 곳에서(너무 급하게 속보로 이동하다 보니 휴식처 이름도 모르고 사진만 찍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이 공룡능선 조망이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신선봉이었다) 쉬고 있는데, 공룡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이 "지금 들어가려고요"하고 묻는다. "예"하고 대답하자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해 사라진다.
(본격적으로 능선을 타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등산로. 암릉 능선을 비집고, 좁은 길이 나 있지만, 잘 정비된 편이다. 군데군데 쇠줄에 의지해야하는 급경사 오르막내리막이 있으나 그 또한 통과가 어려운 길은 아니다. 그러나 산행에서는 항상 안전이 최선, 특히 공룡능선은 내리막오르막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조금 더 가다가 흰구름이 걸친 공룡능선 사진찍기에 열중해 있는데, 이번에는 안면이 있는 강릉시 인사들이 땀에 젖어 바위길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이게 누구야." 서로 인사를 하고 난 뒤 "지금 공룡으로 들어가냐"고 묻더니 "에이 지금 시간엔 안돼"하면서 "그냥 같이 내려가자"고 한다.
만류하는 그들과 헤어져 1시간을 더 이동한 뒤 공룡능선 3분의1 지점 쯤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컵라면을 꺼내 물을 부으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분명 집에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 식었다.
이제 내 배낭 속에 있는 것은 고구마 1개, 감자 1개, 토마토 1개. 초콜릿 1개 뿐.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로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을 떨칠 수 없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입으로는 먹고, 발로는 걸으면서 공룡능선 산행을 서두르는데, 역시 명불허전, 공룡능선은 쉬운 산행길이 아니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그만큼 올라가는 힘든 산행이 너댓차례 반복되니 이제는 내리막길이 나와도 반갑지가 않다. 능선이라는 것이 반드시 내려간 만큼 다시 올라와야 하기 마련이기에 쉬운 내리막길이 나타났다고 해 반가울리가 없는 것이다. 올해들어 두번(오색-대청-오색, 한계령-서북능선-대청-오색) 대청을 넘는 등 꾸준히 주말 산행으로 체력을 키운 것이 그나마 버팀목이 됐다.
(힘든 산행 내내 감탄사가 에너지가 됐다. 공룡능선에서는 동서남북 원,근경이 모두 암릉 미학의 절정의 보여준다)
(해발 1111m를 알리는 설악산국립공원 안내 표지판. '1'만 4개가 나란히 있는 해발 표고가 눈길을 끈다)
(중간을 조금 더 지난 지점에는 바위 암벽 사이로 암릉 능선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휴식처가 있다. 신행을 함께하는 동반자들이 점심이나 간식을 먹으면서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공룡능선으로 드나드는 길목인 마등령 정상에 도착해 돌아본 공룡능선. 기기묘묘한 바위 암봉이 구름 사이로 솟아 신비감을 더한다. 공룡능선에 운해가 깔리고 구름 사이로 암봉들이 곳곳에 봉우리만 드러내면, 천하 제일의 절경이라는데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대만족이다)
그렇게 위 사진에서 보이는 것 처럼 바위 봉우리가 칼 처럼 솟아 있는 천하의 절경 공룡능선 5.1km를 주파하고, 지난 5월에 되돌아갔던 마등령 정상에 도착하니 천상화원 처럼 야생화 꽃밭이 나를 반긴다.
한숨을 돌리면서 꽃밭 뒤로 펼쳐지는 공룡능선의 절경을 뒤돌아보니 인간세상이 아닌 곳을 지나온 듯 싶다.
현재 시간은 오후 4시20분.
이제는 됐다. 내려갈 일만 남았고, 시간을 보니 해지기 전에 충분히 주차장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친 와중에도 마음이 편해진다.
6.5km를 내려가 소공원 주차장 가까운 곳에 다가서니 "어 이게 누구야". 아까 공룡능선 입구에서 마주쳤던 강릉 친구들이 이제야 나와 비슷한 시간에 거기에 다달아 다시 조우를 하게됐다.
그들이 나를 보더니 놀라서 하는 말.
"중간에 새서 지름길로 내려왔지?"
그런 그들에게 내가 한마디 한다. "공룡은 한번 들어가면 중간에 새는 길 없다는 거 몰라. 오직 전진 아니면 후퇴 뿐인 곳이 공룡이야."
왜 그들은 내가 중간에서 샜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설악산 입구 소공원을 출발한 시간이 새벽 5시30분인데, 나는 10시30분이라고 하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공룡능선 등줄기에서 나 보다 훨씬 많이 쉬고, 여유있게 천하에 둘도 없는 절경을 눈과 가슴에 담으면서 산행을 즐겼으리라.
아쨌든 나의 공룡능선 산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총 소요시간은 8시간40분.
수도권 사람들은 보통 밤 11시에 속초행 막차를 타고 설악산에 도착해 새벽 3-4시 쯤부터 무박 산행으로 11시간- 12시간 정도를 계획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동해안에 살고 있기에 출발 시간이 한참 늦었는데도, 종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급함이 지배했던 산행의 아쉬움도 적지않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만 몰두하다가 사실 천하제일 경치를 구석구석 구경도 못하고, 범봉, 신선봉, 나한봉, 1275봉 등 공룡 능선의 수많은 봉우리 이름도 제대로 확인치 못하고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 온 것이다.
다음번에는 좀더 여유있게 공룡을 타야지. 그냥 머리에만 담아 온 공룡능선의 전경이 다시 가고픈 그리움과 겹쳐 이 순간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아마도 가을 단풍철 경치가 압권일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산행 인파에 떠밀려 다니는 등산이 될 수도 있겠다.
(위 사진 두장은 지난 5월에 마등령까지 갔다가 시간이 없어 발길을 돌리면서 공룡능선을 렌즈에 담은 것. 흰구름이 살짝 덮힌 공룡능선과 완연한 대비를 보여 준다. 마치 딴세상처럼)
(지난 5월 한계령-대청봉 서북능선을 넘으면서 내려다 본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산줄기. 멀리 그 유명한 울산바위와 속초 시내 너머 동해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과연 설악은 설악이다)
*참고: 산행중에는 반드시 충분한 요깃거리를 가지고 가야한다.
먹을 것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무턱대고 공룡능선을 탔다가 사실 허기가 져 거의 탈진할 뻔 했다. 초콜릿 1개가 없었다면, 견디지 못하고 구원을 요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등령에서 내려올 때는 온몸을 거의 땀으로 목욕한 상태에서 몇번을 나무에 기대 쉬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지나가던 등산객이 "비 맞았어요? 아니면 땀 이예요?"하고 묻기도 했다. 사실 그날 공룡능선은 비가 내리다가 햇살이 비추다가 날씨가 종 잡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 연출됐다.
공룡능선과 마등령을 지나 비선대로 가는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만난 20대 젊은이는 나에게 "주차장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물은 뒤 "다리가 풀려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고통을 토로했고. 남편과 함께 공룡능선을 넘은 충청도 아주머니는 고생이 너무 심했던지 "뭐 이런 곳에 데리고 왔냐"고 계속 투덜거리기도 했다. 새벽에 양양 오색을 출발해 대청봉을 넘어왔는데, 희운각 쪽에서 바로 천불동으로 내려가지 않고, 남편이 공룡능선으로 방향을 튼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그 아주머니에게 해준 말 "남편에게 고마워하세요. 이런 경치를 아무나 구경할 수 있겠어요. 땀 흘려야만 볼 수 있는 경치, 인생도 그런 것 아니겠어요. 충청도에서 먼 설악산까지 와서 대청봉 넘었는데, 공룡능선 못 타고 가면 그것도 후회거리죠, 아마도 나중에 친구들에게 자랑자랑 하게 될 걸요."
옆에있던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그렇지, 그렇지"를 연발한다.
그런데 정말 허기가 졌다. 내가 설악산을 내려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일이 뭘까?
설렁탕 집이 보이길래 무작정 들어 가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한그릇을 뚝딱 비운 것이다. 땀을 너무 흘려서 그런지 설렁탕 먹기 전에는 계속 오한이 밀려왔다.
역시 너무 무리한 산행은 금물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다음 산행을 계획하고 있으니 중독은 중독이다.
그날 설악산 공룡능선에는 보통 11시간-12시간, 유격훈련을 방불케하는 산행을 하는 40-50대들이 즐비했으니 참 중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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