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서양의 전쟁사를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화제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는 우리나 너무나 잘 아는 '한니발'과 함께 또 한명의 로마 장군 '스키피오'가 등장합니다. 저는 시오노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김석희 옮김)') 15권을 읽은 뒤 서양사에 또 한번 눈을 떴습니다. 로마는 서양의 모태이면서 주춧돌 입니다. 로마를 빼고, 오늘의 유럽 세계를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인이야기 책은 또 다른 책을 찾고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읽은 뒤 이스탄불과 이슬람, 유목세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를 더욱 깊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소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들에게 시간이 없더라도 로마인이야기 책 만큼은 꼭 읽으라고 추천합니다. 그것은 인류사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여행을 가더라도 역사적 지식을 갖추고 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천양지차 입니다.)
지난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계기로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CNN 기자는 이탈리아 중부 칸나에 평원에서 마이크를 잡고 오프닝 보도를 했습니다.
칸나에는 걸프전과 관계가 있는 지역도 아닌데, 왜 세계적인 뉴스 방송사 기자가 난데없이 칸나에 평원을 찾아 갔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칸나에는 세계 전쟁사에서 한획을 긋는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기 때문에 CNN기자가 칸나에 밀밭을 찾은 겁니다.
칸나에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6년 저 유명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과 로마군이 운명을 걸고 한판 회전을 벌인 곳 입니다.
결과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의 완승.
당시 로마는 기병 7000명을 포함해 주력부대인 중부장 보병까지 모두 8만7000명의 군사들을 칸나에에 집결시키고 한니발과 한판 회전을 준비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만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위험한 도박을 성공시킨 한니발은 그때까지 로마군을 연파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휘젖고 다녔습니다.
당시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정면 승부로는 도저히 한니발을 이길 수 었다고 판단, 장기 지구전 전법으로 한니발 군을 괴롭히지만, 전투에서는 큰 소득이 없어 로마 내부로부터 소극적 전법이라는 큰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실각하고, 로마는 최대한 군사들을 모아 칸나에 평원에서 한니발 군에 맞서 반격을 위한 일전을 벌이게 되는 것 입니다.
로마군에 맞서는 한니발은 보병 4만6000명과 기병 8000명 등 모두 5만4000명 병력을 이 전투에 투입합니다. 숫적으로 당연히 한니발의 열세였지만,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은 그와 함께 알프스를 넘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역전의 동지들 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한니발은 그가 자랑하는 특유의 '초승달 진법'을 펼쳐 보이며 로마군을 공략, 먼저 기병을 쫓아버리고 중무장 보병을 완전히 포위, 섬멸하게 됩니다.
칸나에 회전에서 로마는 무려 6만명이 사망 또는 부상을 당하고 1만명이 한니발 군에게 잡혀 포로가 됩니다. 참담한 결과죠. 로마는 이제 재기불능의 상태가 됐다고 모두 믿었고 일부 로마의 동맹도시들이 이탈하는 조짐까지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전쟁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의 최고 통치자인 전,현직 집정관이 칸나에 전투에서 모두 사망하고 오늘날 우리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원로원 의원 80명도 기병으로 직접 참전해 전사하는 것 입니다.
최고통치자가 전투 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국회의원들이 앞다퉈 전장으로 달려가는 공화정 로마의 정신이 오늘날과 많이 비교되지 않습니까.
결국 로마는 칸나에에서 그렇게 혹독한 참패를 맛 보고도 그 같은 정신을 밑거름으로 다시 군세를 정비, 재기하게 됩니다.
칸나에에서 대승을 거둔 한니발은 군사들을 이끌고 로마의 성벽 근처까지 진출합니다. 그때 로마는 '전쟁의 천재' 한니발이 로마를 직접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떨칠 수 었었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수도 로마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로마의 가장 큰 강점인 도시 동맹체제가 아직 건재했기 때문입니다.
자칫 로마를 공격했다가 배후에서 동맹 도시들의 공격을 받아 큰 위협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공화정 로마는 그렇게 위대한 나라였습니다.
로마의 재기는 스키피오라는 젊은 장군이 맡습니다. 스키피오는 사실 로마군 막료 장수로 한니발과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수차례 패퇴한 적이 있는 장군입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로마 본토에 그대로 둔채 기원전 202년 지중해를 건너 카르타고 본토(오블날 북아프리카 튀니지 일원)를 공격하면서 상황은 반전됩니다.
카르타고 본국에서는 십수년간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하고 다니던 한니발에게 급히 SOS를 타전하게 되고, 한니발은 눈물을 머금고 본국을 구하기 위해 돌아옵니다.
그리고 맞붙은 전쟁터가 카르타고 인근의 자마라는 평원 입니다.
이곳에서 양측은 약 4만명씩의 병력을 투입해 맞붙습니다.
보병에서는 카르타고 군이 우세했지만, 기병에서는 로마군이 숫적으로 많았습니다.
결과는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의 완승. 한니발과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전법 등을 꿰뚫은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법을 역 이용해 카르타고군을 궤멸시킵니다.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은 2만명이 전사합니다. 당시 지중해의 상업 국가였던 카르타고는 용병으로 운영되던 나라였기에 이 패배로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습니다.
자마 회전에서 스키피오가 승리한 것을 두고 역사에서는 "한니발에게서 전쟁을 배운 제자가 스승을 완전히 꺾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중해의 해상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치열하게 다투던 카르타고는 자마 회전에서 패배한 뒤 쇠망의 길로 들어서고 결국 얼마뒤 로마와 카르타고가 다시 맞붙은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완전히 멸망합니다. 로마는 멸망한 카르타고 성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그 위에 생물이 존재할 수 없도록 소금을 뿌렸다는 일화까지 전하고 있으니 큰 전쟁에서 무릎을 꿇은 한 나라의 쇠망이 참으로 참혹합니다.
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스키피오 장군에게 로마는 "아프리카를 제압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최고의 존칭을 바칩니다.
일화를 한가지 더 덧붙이면 자마 전투가 끝난 뒤 의기양양해진 상태에서 한니발을 만난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이 에상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 3명을 꼽는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스키피오는 자기 이름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한니발은 첫번째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알렉산더이고, 두번째는 기원전 3세기 경에 그리스 북부에 존재했던 이페이로스의 피로스 왕, 세번째는 한니발 본인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당신이 자마에서 나를 이겼다면 어떻게 되냐"고 스키피오가 한번 더 질문을 던지자 한니발은 "그랬다면 당연히 내가 제일 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전쟁에 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장군이지만, "자마 전투의 패배는 로마의 정신에 카르타고가 무릎을 꿇은 것이지, 결코 내가 전투 능력이 부족해서 진 것은 아니다"라고 한니발은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승자인 스키피오를 기억하는 세계인들은 많지 않지만, 한니발은 불세출의 전쟁 천재로 여전히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니발이 결국 전쟁사의 평가에서는 이긴 것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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