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86대 18 공신의 아이러니

좋은산 2013. 8. 27. 22:04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이겨내고 나면 반드시 논공행상이 뒤따르게 마련이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적을 이롭게 하거나 적을 도운 자들은 가차없이 발본색원, 후대의 경계로 삼아야 하고 피땀 흘려 나라와 백성을 지킨 사람들은 그 공을 기려야 합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외침 가운데 하나인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1592년 4월14일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선발대 1만8000명이 부산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8년까지(정유재란 재침 포함) 계속된 전쟁이었습니다.
 왜적이 국토를 유린한 7년간 우리 백성들은 정말 혹독한 시련을 맛 봐야 했고, 그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이름없는 민초들까지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임진왜란이 끝난뒤 이뤄진 공신 책봉이 두고두고 논란을 빚습니다. 누가 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는 공식 책봉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먼저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부터 살펴보죠.
 임진왜란 이후 책봉이 이뤄진 공신은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선무공신(宣武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 3종류입니다.
 그런데 청난공신은 왜란 중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 등 반란을 진압한 공을 기렸기에 흔히 임진왜란 공신을 말할때는 호성, 선무 두 종류만 언급됩니다.
 호성공신은 의주까지 몽진을 한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도운 신하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공신 책봉이고, 선무공신은 전장에서 왜적들과 싸워 전공을 세운 무장들을 위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공신의 규모를 보면 그 차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의 피난길을 수행한 호성공신은 1등 공신에 이항복 정곤수 2명을 비롯 무려 86명이 1∼3등 공신에 각각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럼 선무공신은 어떨까요. 바람앞에 등불이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장에서 왜적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무장들이니 당연히 그 규모가 크다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겠죠.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선무공신은 1등에 이순신, 권율, 원균을 비롯 3등공신까지 모두 합해도 고작 18명입니다. 얼핏봐도 호성공신의 4분의 1도 안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 장수로 부산포 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해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임진왜란 개전 첫 싸움을 벌이고 숨진 부산진 첨사 정발, 또 과거 교과서에까지 등장해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동래부사 송상현, 비록 패전하기는 했으나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을 맞은 신립 등 초개 처럼 목숨을 던진 무장들은 물론이고 곽재우, 고경명 등 의병장들도 누구하나 선무공신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반면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모신 신하들은 내시 24명을 포함해 86명이나 공신에 책봉이 됐는데, 이런 차이가 두고두고 임진왜란 논공행상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시빗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호종한 신하들은 많이 공신에 참여시키고, 싸움에 임한 장수들은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고 선조실록에서 비판했겠습니까.
 절대군주제 국가에서 전란중에 임금이 화를 당하지 않도록 피난길을 호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도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무장들의 공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생각이겠지요.
 물론 뒤에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발급하면서 다수 보완을 하고, 임진왜란중 전사한 장수들에 대해 후일 추증 등의 절차를 통해 공훈을 위훈하는 작업이 이뤄지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일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공신의 허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지금도 각급 기관, 기업체에서는 직접 주민들과 부딪히는 현장 부서 보다는 '권력' 가까이 있는 지원부서가 더 강한 힘을 보유하고 인사, 표창 등 각종 특전에서 우대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요.
 '한사람의 인재가 수만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라고 해도 현장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고초 또한 제대로 평가받아야 마땅하고, 특히 포상에 있어서는 균형감각이 더욱 중요한 것 아닌가요.
 혹시 임진왜란 이후 공신책봉 처럼 두고두고 논란을 빚는 포상이 우리 역사에서 이어지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뎃잠을 마다하지 않은 선인들의 공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기에 이후에도 수난의 역사가 반복되는 건 아니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임진왜란 때 구국의 일념으로 떨쳐 일어난 의병장과 선무 공신록에 오르지 못한 무장들은 그래도 이후 역사에서 백성들의 영웅으로 후세에 그 무용담이 전해지고 있으니 민초들 사이에 살아 숨쉬는 역사는 늦을지언정 공훈을 제대로 평가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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