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산행기- 영동, 영서를 아우르는 순백의 능선
선자령 능선을 다녀왔습니다.
선자령은 대관령 북측에 자리잡고 있는 고개(嶺)입니다.
영역 구분을 하는 지도상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강릉과 평창의 경계가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저는 영동과 영서를 아우르는 '소통의 고개'라고 부릅니다.
옛 사람들은 대관령, 선자령 고개를 넘어 오고가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키우고, 교역을 하고, 문화를 창출했습니다.
지금이야 4차선 고속도로를 따라 승용차로 내달려 채 15분도 안돼 훌쩍 넘어갈 수 있는 고개지만,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대관령, 선자령을 넘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그 고갯길에 '잔도(棧道)', '조도(鳥道)'라는 표현이 쓰였을까요. 험한 벼랑에 선반을 걸쳐 만든 길, 또는 새들이나 넘나들 수 있는 길 이라는 뜻이니 문학적 운치를 넘어 옛 선인들이 대관령, 선자령을 얼마나 힘든 고개로 인식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선자령은 지금 온통 눈세상 입니다.
희디 흰 눈 밭 위에 수없이 많은 풍차가 연신 바람을 맞고, 또 바람을 일으키면서 돌아가고, 나뭇가지에는 서리꽃, 상고대가 활짝 피어있는 환상적 경치, 상상이 됩니까?
거대한 바람개비를 하염없이 돌리면서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능선의 풍차 또한 묘하게도 모두 흰색으로 치장을 했으니 그냥 '순백의 나라'라고 표현을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듯 싶습니다.
그런 세상을 걸으면서 어찌 몸과 마음이 정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파에 찌든 모든 스트레스, 부질없는 오만가지 잡념이 바람에 씻기고, 새하얀 눈밭 위에 그대로 녹아 내리는 경험, 백두대간 주능선인 대관령, 선자령은 그런 유토피아적 선물을 안겨주는 곳 입니다.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바라보는 파란 동해바다와 강릉시내의 풍광 또한 한번 눈에 담으면 지워지지 않는 경치입니다.
갑오년 새해가 시작된 2014년 1월11일, 선자령이 꼭 그러했습니다.
맹추위 때문에 습기가 부족했던 탓인지 아쉽게도 겨울 산행의 백미인 상고대 구경은 하지 못했지만, 지난해부터 내린 눈이 켜켜이 쌓여 연출해내는 설경은 가히 능선 미학의 극치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며칠전부터 엄동의 한파가 맹위를 떨친 뒤끝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염려했던 것 보다 춥지 않았던 것도 산행의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출발 장소는 대관령휴게소.
옛 2차선 영동고속도로의 상행선 휴게소 입니다.
오늘은 회사 산악회 동료들과 함께하는 산행이어서 평소보다 많이 떠들썩 합니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선자령 표지석이 있는 정상까지는 편도로 정확하게 5km. 왕복으로는 10km 입니다.
선자령은 겨울철이 되면 전국에서 산객들이 몰려드는 명소 중의 명소이지만, 사실 등산으로 따진다면 그리 힘든 코스가 아닙니다.
산행 들머리인 대관령의 해발 표고가 832m인데, 선자령 정상이 1157m 이니까 300m 정도를 더 올리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산행 코스가 완만한 능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막판에 약간 오르막이 나타나는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나요.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분들도 무난하게 등산의 묘미를 즐길 수 있기에 더 많은 산객들이 몰려드는 것 같습니다.
등산로 중간에는 유네스코에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릉 단오제(중요무형문화제 제13호)의 주신인 범일국사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을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당과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 동해 바다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 시설도 산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풍차가 산객들 가까이로 다가서 그 윤곽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선자령 정상에 점점 다다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선자령에서부터 곤신봉, 양떼목장 등지로 이어지면서 순백의 능선을 수놓고 있는 풍차는 참으로 이국적입니다.
누군가는 말 합니다.
"이 좋은 능선에 다른 인공 구조물이 들어섰더라면 아마도 경치를 망치는 흉물이 됐을텐데, 풍차는 예외인 것 같다"고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름이면 고원지대의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겨울이면 온통 눈밭이 장관을 이루는 이곳 바람의 마을에 풍차만큼 어울리는 인공의 궁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것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풍차는 대관령, 선자령의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 엑세서리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풍차가 많이 서 있는 곳은 예외없이 바람이 거셉니다.
어떤때는 그냥 거센 정도가 아니라 무시무시하기도 하고, 한겨울 칼바람이 몰아칠때는 말 그대로 살을 에이는 듯 합니다. 태백산이나 소백산 등 바람으로 유명한 고산 능선에서 맞는 바람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겁니다.
다져진 눈 밭을 칼바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만들어놓은 흔적은 또 한편으로 예술입니다. 쌓인 눈에 연신 바람이 스치면서 마치 여인네의 치마선 마냥 아름다운 곡선이 곳곳에 결을 이루고 형성돼 있습니다.
그 정도로 바람이 센곳 이기에 선자령을 등산할 때는 반드시 추위와 바람에 단단히 대비해야 합니다.
인간사가 다 그러하듯이 큰 감동과 행복은 그냥 편하게, 저절로 얻어질수가 없습니다.
선자령의 매혹적인 설경 또한 살을 에는 칼바람과 추위, 등산의 수고를 견뎌내야만 얻어지는 것이니 그 속에서 맛 보는 산행의 감흥 또한 비견할데가 없는 것 입니다.
왕복 10km 산행 시간은 3시간에서 4시간 정도를 잡으면 넉넉합니다.
선자령 등산 코스는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하는 것 외에도 대관령 옛길을 따라 반정에서 오르거나 강릉시 성산면 보현사에서 출발해 대공산성과 곤신봉을 거쳐 오르는 등의 코스가 있습니다.
대관령 옛길이나 대공산성 쪽 코스는 오르막 등산로를 타야하는 코스이기에 시간도 더 걸리고, 그만큼 땀의 수고도 더합니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산객들은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해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를 택합니다.
선자령에서 북쪽으로 계속 백두대간 능선을 타게되면, 곤신봉과 매봉, 소황병산, 오대산 노인봉을 거쳐 진고개휴게소로 이어집니다. 백두대간 종주 산객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곳 입니다.
(오전 9시30분, 산행 들머리인 대관령휴게소 모습입니다. 영하 10도 이상 맹추위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습니다)
(동해바다와 강릉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 입니다. 날씨가 맑으면 눈이 호강을 합니다)
(정상에 다다르면 풍차가 환경하듯 돌아갑니다. 눈 밭 위에서 바람을 맞는 풍차와 선자령 고원의 모습은 여느산에서는 맛 불 수 없는 정말 이국적이면서 목가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선자령 정상의 표지석 입니다. 참 크죠. 백두산-선자령-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주 능선의 전체 길이가 무려 1400km에 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자령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계속 가면 곤신봉-매봉-황병산-오대산 노인봉을 거쳐 진고개에 이르게 됩니다. 멀리 동편에 크게 보이는 넓찍한 봉우리가 황병산 입니다)
(회사 동료들과 선자령 정상에서 시산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갑오년 한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행복, 건강, 회사와 개인의 발전 등등 모든 소원 보따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산행 출발지인 대관령휴게소에 돌아오니 어느새 관광버스들이 가득 들어차 빈자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다 전국에서 선자령, 대관령, 능경봉 등지로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을 태우고 온 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