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산
2013. 10. 20. 15:29
오늘은 무릉계곡 단풍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산에 거의 중독되다시피한 저는 1년에 딱 한번, 전국의 모든 산이 절정의 자태를 뽐내는 단풍철이면 어김없이 배낭을 챙깁니다.
제가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동해시 무릉계곡.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 고적대 등 1300m 이상의 고산준령에서 뻗어 내린 계곡 경치가 압권인 곳입니다.
사계절이 모두 좋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홍엽이 절정에 달하는 무릉계곡의 단풍과 소복이 쌓인 흰눈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즈음, 강원도의 산에서는 장엄한 행진이 이어집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으로, 북에서 남으로, 단풍은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없이 기막힌 계절을 선물하면서 대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계절의 변화를 산 만큼 잘 느낄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강원도의 계곡이 모두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든 지금 해발 1000m 이상의 산 꼭대기에는 한기를 느낄 만큼 찬바람이 불면서 낙엽이 지고 있습니다. 산은 같은 산이로되 장소에따라 맛보는 느낌과 무게는 확연히 다릅니다.)

무릉계곡은 매년 10월 중,하순이면 활활 타오릅니다.
두타산성-십이폭포-수도골-문간재-신선봉-사원터 구간의 단풍이 특히 좋습니다. 가히 무릉계곡 경치의 엑기스라고 할 만한 곳이죠.
사원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늘문-관음암 코스를 추가한다면 무릉계곡에서 최고의 경관을 모두 맛 본 산행이 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겹게 다리 품을 팔아야 하지만, 한고비 오를 때 마다 ‘우와-'하는 탄성이 절로 내뱉어 집니다.
산을 다니면서부터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마주하게 되는 경치이지만, 마주하는 느낌은 해마다 새롭고, 올해는 일교차 때문에 단풍이 더욱 곱습니다.


그렇게 황홀경에 취하는 단풍 산행을 할 때 떠 올리는 시(詩)가 있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알' 입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단풍도 마찬가지겠죠.
대추는 그나마 사람이 가까이서 돌보기라도 하지만, 저 나뭇잎은 저 혼자 풍찬노숙을 모두 헤치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날은 포근한 햇살 아래 몸을 누이고, 어떤 날은 가만히 내리는 보슬비에 흠뻑 젖어보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천길 벼랑 끝 바위틈에서, 하늘을 가린 소나무 그늘 밑에서, 세찬 비바람 속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홀로 기를 써야 하는 날이 훨씬 많았을 겁니다.

우리네 인생사와 비교되지 않습니까?
단풍철 숲속은 마치 제 스스로 불을 밝히는 듯 환합니다. 노랗고 붉은 단풍이 숲 속으로 스며드는 햇볕을 받아 오묘한 빛을 생성해 내기 때문입니다.
나뭇잎이 등불 처럼 빛을 낸다고 하면 믿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가을산은 그렇게 화려하고, 매혹적입니다.
생면부지의 등산객과 사과 한쪽 나눠 먹으면서 정을 나누는 것도 산행의 큰 즐거움 입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어느 산을 다녀봤소." "오늘은 어디까지 돌아 볼 생각이오." "산은 어디가 좋습디까" 등의 질문이 스스럼없이 이어지면서 산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친구가 됩니다.
무릉계곡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인 사원터에 다다르면 고적대(1353m)로 향하는 길목인 연칠성령이 눈 앞에 떡 버티고 섭니다. 령(嶺)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고, 문간재나 사원터 등 휴식처를 거쳐 이동해야 하는 것으로 보아 연칠성령은 옛날 동해 사람들이 정선군 임계면 방면으로 다니던 고갯길이 분명한데, 한반도에서 가장 험준한 백두대간 등허리를 타고 넘어야 하기에 고갯길을 넘으려면 1시간30여분 동안 시쳇말로 빡센 등산을 해야합니다.(참고로 무릉계곡 입구에서 고적대를 왕복하는 등산은 7시간을 잡아야 함)
옛날 사람들이 짚신을 신고 이 험산준령을 넘나들었다고 생각하면, 오늘날 저의 등산은 그야말로 호사 수준입니다.

산에 가는 사람들은 몸에 좋다는 피톤치트니 숲의 음이온 효과니 하는 것을 굳이 세세하게 살피지는 않습니다. 그냥 혼자든, 둘이든, 여럿이든, 산길을 함께 걸으면서 땀 빼고, 유유자적 하는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요, 요사이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로 ‘힐링’이기 떄문입니다.
숲을 걷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마음은 어린아이가 되고, 노자 장자가 설파한 어려운 인생 철학이 한결 쉬워집니다.
더욱이 이즈음 산에서는 가장 화려한 변신이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감상 기회를 부여하는 거대한 단풍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으니 어찌 땀 흘리는 수고를 마다하겠습니까.
아주 가끔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을 만나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멧돼지가 뛰는 기척에 긴장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나면 또 등산 배낭을 챙기는 것은 숲에 그만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