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치악산 구룡사 코스 우중 산행기
가파르기 이를데없는 산길에서 땀과 빗물에 온몸이 젖었다.
미처 우비도 준비하지 못해 하산길에는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 이었으나, 아침에 찌뿌드하던 몸은 어느새 솜털 처럼 가벼워졌다.
지난 9월6일 원주 치악산 산행.
오늘도 즐거운 휴가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느 코스를 탈까, 고민하다 구룡사에서 세렴폭포와 사다리병창을 거쳐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5.6km를 격하게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치악산의 진면목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코스로, 2년전에도 한번 다년간 적이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2-3km 떨어진 국립공원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서 이동할 요량으로 공원 주차장에 들어섰더니 직원이 친절하게 "오늘은 평일이라서 위로 올라가도 주차 공간이 있을 것"이라며 등산 코스 입구까지 그냥 차로 이동하란다.
이게 웬떡인가. 물론 산행이란 것이 힘들게 걸으면서 자연과 호흡하며 몸과 정신을 힐링하자는 것 이기에 공원 입구 주차장에서 등산로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것도 크게 거부감을 보일 일은 아닌데도 사람 심리가 참 간사해서 차를 몰고 등산로 입구까지 이동하라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30여대 주차공간에 아직 절반 정도는 비어 있다.
"산에 가냐"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주차비 6500원을 선불로 받는다.
주차장 옆에 요깃거리를 파는 너댓군데 매점이 있길래 김밥 두줄을 사니 집에서 가져온 삶은 계란 2개와 사과 1개, 김밥 두줄, 두유 1개가 배낭 속에 점심 겸 간식용으로 준비된다.
드디어 출발. 현재 시간은 10시35분.
오후 4시30분에 원주시내에서 약속이 있어 늦어도 4시까지는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하니 오늘도 바쁜 산행이다.
치악산 국립공원 구룡탐방지원센터를 거쳐 구룡사 가는 길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니 산길의 상큼한 기운이 그대로 온몸에 녹아드는 듯 하다. 이제 곧 단풍으로 스러질 나뭇잎들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듯 훨씬 진한 푸르름이 느껴진다.
예전보다 길이 참 좋아진 것 같아 이리저리 둘러보니 계곡 옆으로 목재 데크 길-흙 길이 새롭게 조성된 것이 눈에 들어온다. 구룡사 코스의 보행 환경 개선공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등산,탐방객들의 편리를 위해 길을 개선하는 공사가 상당 부분 진척된 것 같았다.
구룡사에 들러 절집을 요모조모 구경한 뒤 '보광루' 밑 돌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다시 등산로다.
입구에서 구룡사까지 벌써 900m를 걸어 왔다.
(치악산 등산로 입구)
(구룡사)
(세렴폭포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갈림길. 사다리병창 코스와 계곡길 코스가 갈린다')
이제부터는 정말 산길이다. 그런데 구룡사에서 세렴폭포까지 이동하는 2.1km는 계곡 옆 비교적 평탄한 길을 이동하기에 크게 힘들 것 없다. 그냥 좋은 산책 코스다.
세렴폭포에 도착하니 드디어 그 '악명높은' 치악산의 급경사 계단길이 기다리고 있다.
계단 입구에서 사다리병창코스(비로봉 정상까지 2.7km)와 계곡길(정상까지 2.8km) 이 갈린다.
마뭇거림 없이 사다리병창 코스 급경사 계단으로 그대로 올라선다. 계곡길 코스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만, 너덜바위 길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데다 사다리병창 길 처럼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입구부터 계단의 연속이다. 아마도 인간이 산에 만들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계단이 모두 몰려 있는 전시장인 듯 싶다. 나무 데크 계단을 따라 수백m를 이동하니 이번에는 돌계단, 또 철계단, 통나무 계단, 심지어 바위를 그대로 타고 넘는 계단, 나무 뿌리를 이용한 계단까지 정말 없는게 없다.
어떤 곳은 통나무 계단과 돌계단, 철계단이 아예 연어어 설치된 곳도 있다.
'악(岳)'자가 들어가는 산은 예외없이 악소리 나게 힘들다는 속설을 치악산에서 온몸으로 실감한다. 사실 설악산이나 월악산을 비롯 비교적 해발 표고가 낮은 춘천의 삼악산까지 내가 다녀본 '악'자 들어가는 산은 모두 간단치 않은 등반이었다.
(사다리병창 코스의 다양한 계단과 산길. 산에서 만들 수 있는 모든 계단은 다 몰려있는 듯하다)
가파르기 이를데없어 '헉헉' 거친 숨소리가 쉴새없이 터져나오지만, 사다리병창(세렴폭포에서 800m 거리)에 도착하면 그간의 힘겨움이 탄성으로 바뀐다.
바위 벼랑 위 능선, 한사람이 겨울 빠져나갈 좁은 통로가 온통 바위를 다듬어 만든 사다리 처럼 이어져 있다. 100여m 길이 사다리병창 바위길 양 옆은 까마득한 천길 절벽이니 마치 공중에 설치된 돌다리를 딛고 이동하는 듯하다. 그러나 든든한 철제 안전난간 등이 잘 설치돼 있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
사다리병창 구간 입구에는 "거대한 암벽군이 마치 사다리 모양으로 되어있고, 암벽 사이에 자라난 나무들과 어우러져 사시사철 독특한 풍광이 병품 처럼 펼쳐져 있다하여 '사다리 병창' 길이라고 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병창은 영서지역 방언으로 '벼랑' 또는 '절벽'을 뜻한다고 하는데, 영동지역에서도 '뼝창' 이라는 말을 쓰니 어감상 큰 차이는 없다.
(치악산 산행의 백미인 사다리병창의 바위 절벽 통과 구간)
이후로도 비로봉 정상까지 1.9km가 계단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아주 짧게나마 잠시 쉬어가는 평지 능선길이 나오고, 기묘한 모습의 바위가 곳곳에서 시선을 끄니 힘겨움은 많이 가셨다.
그런데 정상을 1km 정도 남겨둔 지점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슬슬 내려갈 일이 걱정되지만, 여기까지 와서 비가 온다고 그냥 돌아갈 일도 아니다.
비를 맞으면서도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도 찍고, 할 것 다 하면서 오르는 사이, 표지판을 보니 비로봉까지 300m가 남았단다.
구룡사에서 5.3km를 이동해 왔는데, 300m 쯤이냐 하고, 단숨에 오르려는데,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다.
계단의 경사가 처음 세렴폭포 쪽에서 올라섰을 때 계단 보다 오히려 더 심한 것 같다. 사실 1000m 이상급 고산의 경우 정상 가까이에 다다르면 많이 지친 상태여서 아주 짧은 거리도 왜 이렇게 머냐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눈 앞에 보이는 저 봉우리만 올라서면 정상인 것 같은데, 올라서면 또 더 높은 곳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경우다. 따라서 아직은 표지판에 보이는 실제 거리보다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오르는 것이 지치고 힘든 상황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게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 순간 하늘이 보이면서 길 옆으로 거대한 돌탑이 나타난다.
비로봉 정상(1288m)이다.
치악산 비로봉에는 큰 돌탑(미륵불탑)이 3개가 서 있는데, 안내판에 따르면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중(일명 용진수) 씨가 쌓은 것 이라고 한다. 꿈에 비로봉 정상에 3년 안에 3개의 돌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1962년 9월부터 혼자서 탑을 쌓기 시작해 1964년에 5층으로 된 돌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 후 1967년과 1972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진 것을 용창중 씨가 그해에 각각 다시 복원했다고 하니 그 집념과 기원의 힘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현재의 돌탑은 1994년 이후 두차례의 벼락을 맞아 무너진 것을 국립공원관리사무소가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남쪽 탑은 '용왕탑', 중앙탑은 '산신탑', 북쪽탑은 '칠성탑'이라고 안내판에 소개돼 있다.
(치악산 정상의 돌탑과 정상에서 바라 본 원주시내)
치악산 정상에 올라섰으니 치악산의 유래에 대한 공부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옛날에는 치악산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해 적악산(赤岳山)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은혜를 갚은 꿩 전설이 알려지면서 치악산(雉岳山)으로 개명을 했다는 것이다.
전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무과 시험 응시에 나선 선비가 치악산을 지나가다가 구렁이가 꿩의 둥지에서 꿩 새끼들을 잡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화살을 쏘아 구렁이를 죽이고 새끼 꿩을 구해 준다. 날이 저물어 산속에서 이리저리 잠자리를 구하던 선비가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초가집을 찾아 가 하룻밤 유숙을 청하자 젊은 아낙이 선뜻 밥을 해 주고, 방을 내 주는 것 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깨어 보니 구렁이가 선비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선비가 살려달라고 하자 구렁이가 말하기를 "낮에 네가 죽인 구렁이가 내 남편인데, 동이 트기 전까지 저 위 상원사 절터의 종이 세번 울려 (숫구렁이의) 원혼을 달래 준다면 너를 놓아 주고 승천하겠다"고 했다. 구렁이에게 몸이 칭칭 감겨 있는 선비가 어떻게 폐허가 된 절터의 종을 울릴 수 있겠는가. 선비가 자포자기 해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는데, 동이 클 무렵 갑자기 산 위 절터에서 종이 세번 울린다. 구렁이에게서 풀려 난 선비가 절터의 종각에 가 보니 종 밑에 머리가 깨진 어미 꿩 두마리가 죽어 있었다, 새끼를 구해 준 선비를 위해 어미 꿩이 죽을 힘을 다해 번갈아 머리로 종을 받아 세번을 울리게 한 것 이었다. 그에 따라 꿩치(雉)자로 치악산이라는 명칭을 쓰고, 현재 치악산 남대봉 상원사에는 보은의 종이 복원돼 있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멸종위기 1급 동물인 구렁이를 치악산에서 복원하자는 여론에 힘이 실리자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상원사 부근에 구렁이 여러마리를 방사했다고 한다.
구렁이는 독이 없는 순둥이라고 하니 앞으로 치악산에서 구렁이를 발견하더라도 너무 놀랄 일은 아닌것 같다.
각설하고
비로봉 정상에서 점심을 먹는데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하산 길이 걱정이어서 서둘러 김밥을 뚝딱 해치우고, 계곡길 방향으로 코스를 잡으니 약 500여m는 데크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는데, 그 다음부터는 예전에 이미 한번 경험했던 너덜바위 돌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정상에서 구룡사 계곡길 코스로 하산하는 입구. 구룡사 방면과 상원사,입석사 방면이 여기서 갈린다)
(세렴폭포. 등산로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아담한 폭포가 자리잡고 있다.)
비에 젖은 돌길 위의 이끼가 매우 미끄러워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으니, 비에 땀에 돌길에 이끼까지 하산길이 등산 때 보다 더 힘든 것 같다. 그래도 1km 정도 너덜 돌길을 통과하니 계곡 옆으로 훨씬 쉬운 길이 나타나고, 이제 치악산 산행도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든다.
계곡길을 벗어난 뒤 "이왕 젖은 몸 더 젖으면 어떠랴"는 마음으로 세렴폭포로 이동하니 등산로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작은 물줄기의 아담한 폭포가 있다.
하산길을 재촉해 진푸른 물빛과 작은 폭포가 일품인 구룡소와 구룡사를 지나니 보행환경개선 공사를 실시한 넓은 흙길이 나를 반긴다.
하루 종일 돌과 바위, 계단에 시달렸던 발이 흙을 밟으니 마치 무슨 솜 위를 걷는 것 처럼 푹신푹신하다.
(위로부터 구룡소와 구룡사 부근 계곡, 보행환경개선공사가 이뤄진 흙길 )
등산복에서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강행군, 치악산 구룡사-사다리병창-계곡길 구간 총길이 11.3km 산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오늘 하루 다리 근육이 한결 튼실해지고, 가슴 깊은 곳, 온몸 구석구석에 치악산의 피톤치드가 스며 들었으리라.
하산길에 계곡을 보니 단풍 나무 활엽수가 적지 않게 분포해 있는 것이 역시 단풍이 아름다운 赤岳이라는 이름이 허명이 아니란 것을 느끼겠다.
치악산 단풍을 볼 만추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주차장에 다시 도착한 시작은 오후 3시25분. 산행시간은 거의 5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