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방패 이지스함 동해에 뜨다
(지난 2009년 동해항에서 세종대왕함 공개 행사가 열렸을 때 과거 해군 시절 추억을 되새기며 쓴 글)
엊그제 동해항에서 세종대왕함 공개 행사가 열렸습니다.
세종대왕함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그대로 우리 해군이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이지스 구축함' 입니다.
함수에서 함미까지 전장 길이가 166m, 좌현에서 우현까지 폭이 21m나 되는 7600t급(군함의 톤수는 일반 상선과는 다름)
함정이라고 하니 일반인들은 우선 그 크기에 압도당할 정도입니다.
세종대왕함이 동해를 항해하는 모습입니다. 길이가 166m에 달하는 배도 바다에 띄워놓으니 무척 작아 보이네요. 그러나 실제로 세종대왕함을 가까이서 본다면 일반인들은 '우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갑판에 해군 장병들이 흰색 정복을 입고 도열해 있는 모습도 눈길을 끕니다. 아마도 기함으로서 주변 함정들의 사열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지스(Aegis) 함은 최첨단 레이더 시스템인 이지스 체제를 탑재한 함정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완벽한 방어체제를 갖추고 미사일 등 첨단 무기로 무장, 공수 양면에서 절대적 능력을 자랑하는 떠 다니는 군사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첨단 방어체계가 암시하듯이 '이지스'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방패에서 유래했습니다. 제우스가 전쟁의 신인 딸 아테나에게 준 천하무적의 방패로,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을 포함해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있는 방패라고 합니다.
세종대왕함은 국내 첫 이지스 함 이라는 명성 때문에 건조부터 진수, 해군 인도 등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군사 뉴스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군함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지난 4월5일 북한이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장거리 로켓을 발사, 세계의 눈과 귀가 한반도에 쏠렸을 때 동해상에 떠 있던 세종대왕함이 로켓 발사를 신속 정확하게 포착하고, 궤적을 추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취재 지역이 달라 이번에 아쉽게도 동해항에서 세종대왕함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고, 승선할 기회를 갖기는 못했습니다. 그저 각종 매체들의 보도를 통해 1000km 밖의 비행체 1000대를 동시에 포착할 수 있는 고성능 레이더와 150km 밖의 목표물 20개를 동시에 타격할 수 있는 대공 미사일과 유도탄, 헬기 등을 탑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세종대왕함이 보유하고 있는 군사적 능력을 혼자서 추측할 뿐 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가 해군 생활을 하던 때를 떠 올려 봅니다. 때는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32개월 군 생활의 대부분을 당시 우리 해군의 가장 강력한 주력 함정이었던 구축함을 타고 함상 생활을 했기에 바다와 배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 해군 생활 덕분에 저는 우리나라 3면의 바다를 거의 다 다녀 보았고, 백령도와 연평도는 물론 우리 땅 독도를 일찌감치 볼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한려수도 해상의 황홀한 낙조, 점점이 박힌 섬 사이 협수로를 장시간 통과해야 만날 수 있는 목포항의 그림 같은 풍광,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 갑문에 물을 채우거나 빼고 들어가야 하는 인천항 도크의 과학, 바다에서 바라보는 부산항의 불야성,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거친 파도가 일품인 우리의 자랑스런 '동해' 등등.
2층 중갑판을 훌쩍 뛰어넘는 거센 파도가 배를 삼킬듯이 덮치고, 함수가 거의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일어서는 등의 로울링과 피칭이 반복적으로 승조원들을 괴롭혀 배멀미 고행에 시달리는 등 견디기 힘들었던 때도 많았지만, 눈 부시게 아름다웠던 우리 바다의 추억이 지금도 바다 생각만하면 주마등이 됩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 해군은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초라했습니다.
제가 타던 구축함도 전장 길이가 120m에 달하는 결코 적지않은 군함이었지만, 2차대전 때 미군이 사용하던 군함을 양도받아 주력 함정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참 서글픈 현실이었죠.
연식이 40년도 넘은 재래식 군함이다 보니 함포 사격을 하면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각종 케이블이 뒤엉킨 배 천정 위에서 녹과 먼지가 막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걸 우리들은 "2차대전 때 녹과 먼지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제거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해군은 당시 어떤 재래식 군함도 새것으로 바꿀 수 있는 수리와 개조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2개월 해상 출동을 마치고 항구에 돌아오면 매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것이 일상사였습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1980년대 우리 구축함들은 해상 방어는 물론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을 태우고 머나먼 원양 실습 항해를 훌륭히 수행내 냈습니다. 미국과 호주, 괌 등 대양을 누비는 수천, 수만km 항해를 척척 수행해내고, 속력도 당시의 신형 함정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미군들이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추억이 있는 저로서는 이지스 구축함을 우리 해군이 보유했다고 하니 정말 감회와 추억이 새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물론 1980년대 우리가 탔던 구축함은 이제는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이지스 함인 세종대왕함을 비롯해 한국형 잠수함과 최첨단 구축함들로 대체됐으니까 모두 옛날 얘기일 뿐 입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나라는 섬나라나 다름없습니다. 남북이 분단돼 육지로는 더 이상 북으로 나아갈 수 없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놓고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바다 뿐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해운, 조선산업이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버팀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런 연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석유를 비롯해 우리가 필요로하는 자원의 대부분도 아직은 바다를 통해서만 수입이 가능합니다. 만약 바닷길이 막힌다면 어떻게 될까요.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의 해양 강대국들 이해관계에 의해 바닷길이 봉쇄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모든 것이 올 스톱 입니다. 생명줄이 막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다는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이고, 대양 해군력을 키우는 것은 과제입니다. 이지스 구축함은 우리의 대양 진출과 해상 운용 능력을 주변 강대국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정도로 만드는 소중한 포석이고,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앞으로 '율곡 이이함'과 '권율함' 등 제2, 제3의 이지스함이 건조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더 나아가 서기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에 울릉도와 독도를 아우르던 해상왕국 우산국을 복속시켜 우리나라 해양개척사에 한 획을 그은 '신라장군 이사부'의 이름을 딴 이지스함 출현도 기대해 봅니다.
물론 그렇게 강한 해군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제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돈 없는 국가, 기술력 없는 국가에게는 결코 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차피 수상생활을 하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바다는 영원한 도전과 극복의 대상입니다. 도전과 극복을 위해서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장비와 기술력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 장비와 기술력은 모두 돈, 즉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 입니다.
1961년 인류 최초로 구 소련의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유인 우주 비행을 했던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서 지구를 보고 "지구는 푸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지구상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푸른 바다를 보고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비약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