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와 일본이 혼쭐난 역사
<지금부터 1000년 전, 11세기에 동해 바다를 휘저었던 동여진족 해구들에 대한 기록은 대마도에 특히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고려사와 대마도 기록을 비교해보면 그들이 울릉도와 대마도를 친 시기가 절묘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마도 현지를 취재하고, 기록을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소중한 소득이었습니다.>
혹시 '해구(海寇)'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역사에서 왜구(倭寇)는 숱하게 배우고, 들어봤지만 '해구'라는 말은 많이 생소한게 사실입니다.
한자 뜻 그대로 옮기면 그냥 '바다의 도적',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해구들이 동해바다를 휘젖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만주에 기반을 두고있던 동(東)여진족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동해 연안을 정말 공포에 떨게 했는데요.
만주에 기반을 둔 여진족들이 동해바다를 휘저었다고 하면 의아할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대륙중심사(史) 영향 때문이고, 사실 고려사 기록 등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경북 일원에 침입한 동(東)여진족 해구에 대한 기록이 일일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1019년에는 이들이 동해를 거술러 내려가 대마도를 공격하게 되는데요. 당시 동여진족의 침입과 피해를 기록한 대마도 사서를 보면, 이들이 어느정도 세력을 떨쳤는지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대마도를 들이친 여진족 선단은 무려 50여척.
배 1척에 60여명씩 모두 3000명에 달했으니까 해적이라기 보다는 거의 군 병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대마도와 그 동남족의 이키섬은 물론 큐슈지방까지 차례로 공략,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살인과 방화, 약탈을 한뒤 239명을 포로로 끌고갑니다.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대마도 사람들은 고려말로 '만이(蠻夷)'를 뜻하는 '도이(刀伊)の적(敵)'이라고 역사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만주에 사는 여진족들이 대마도를 초토화 시켰다면, 동해바다를 완전히 종주해 장거리 항해를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동력선이 판을 치는 요즘도 동해 종주 항해는 그리 만만한 여정이 아닌데, 전적으로 무동력 범선에 의지해야 했던 1000년전에 동해바다를 북에서부터 남쪽 끝단까지 거슬러 항해하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여정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동여진족들의 동해 종주 항해와 대마도 공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답은 동해바다 한가운데 울릉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여진족들이 대마도를 들이친 1019년은 역사서에서 '우산국'이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서기 512년 실직(삼척)과 하슬라(강릉) 군주를 차례로 역임한 이사부 장군의 정벌로 신라에 복속한 우산국은 이후 토산물을 바치면서 벼슬을 받는 등의 지위를 유지하다 고려시대 현종9년과 10년(1019년) 기록을 끝으로 역사서에서 명칭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 시기가 동여진족이 동해바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는 것 입니다.
고려사에는 동여진족들이 대마도를 치기전에 울릉도를 먼저 공격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고려사절요에는 1018년 11월 동여진족들이 우산국, 즉 울릉도를 침입한 기사가 전합니다.
뒤이어 대마도 기록에는 이들 동여진족들이 1019년 3월∼4월에 대마도와 남쪽 이키섬에 이어 큐슈지방까지 들이쳐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다대(多大)했다는 기록이 나오니까 동여진족의 울릉도 공격과 대마도 공격 사이에는 약 4∼5개월 시차가 있습니다.
이즈음 고려사 등의 기록에는 울릉도 주민들이 강릉, 양양, 삼척, 울진 등 강원도 연안지역과 예주(영해, 영덕, 평해 일원) 등 경상도 연안으로 숱하게 도망쳐 나왔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울릉도 주민들이 도망쳐 나오고, 곧이어 대마도에 대한 공격과 약탈이 이어졌다는 것은 결국 울릉도를 공격한 이들 동여진족들이 한동안 울릉도에 눌러앉아 살인과 약탈을 자행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울릉도에 눌러앉았던 동여진족들의 약탈 폐해가 얼마나 심했던지 고려사 식화지 농상조에는 "우산국이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해 농기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이후에는 "여진의 침략을 받고 (육지로)도망해 왔던 우산국 민호(民戶·백성)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기록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산국 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시기를 끝으로 역사서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되고 이후에는 주로 '섬(島)'이라는 표현이나 우릉성주(羽陵城主, 고려 덕종 원년(1032년)고려사 기록) 등의 표현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으니 우산국은 1018년 즈음 대마도와 일본 큐슈 지방까지 유린한 동여진족들의 공격을 받고, 급격히 약화되고 쇠퇴의 길을 걷게됐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그럼 여진족들의 그같은 항해술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대마도와 일본 남단 큐슈지방을 공포에 떨게한 여진족들의 항해술이 '발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발해는 사실 동해를 내해(內海)로 삼았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해상 운용능력이 뛰어난 나라였습니다.
발해는 무왕때인 727년에 일본에 첫 사신단을 파견한 이후 926년 멸망할 때까지 무려 30차례 이상 대규모 선단을 일본에 보내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무역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습니다.
많을 때는 한번에 1000명 이상의 발해인들이 동해바다를 건너 일본과 무역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발해인들의 항해는 모험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무척이나 고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항해 선단이 풍랑에 휩쓸려 난파되는 바람에 한번에 수십, 수백명씩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으니 발해인들이 얼마나 모험적, 도전적으로 바다에 나섰는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발해의 범선들은 한겨울에 일본쪽으로 부는 북서 계절풍을 맞기위해 겨울에 출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니 목숨을 걸고 동해의 격랑을 넘은 그들의 해양 도전 의지에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100여년 뒤 일본 큐슈와 대마도를 쑥밭으로 만든 동여진족들의 항해술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앞서 만주는 물론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땅에까지 세력을 떨치며 북방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발해를 보면 자명해 집니다.
▶또 한가지 의문.
그럼 울릉도가 그렇게 당하는데도 고려의 수군은 가만히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여진족 해구들이 울릉도를 공격하고, 동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일이 잦아지자 고려 조정은 강원도 통천 등지에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를 설치하는 등 동해안의 수군 무력을 대폭 강화하고 간성, 명주, 고성 등의 성을 대대적으로 새로 쌓거나 보수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 권5 문종 18년조 등에 전하고 있습니다.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에는 고려 문종 6년(1052년) 동여진이 바다를 건너와 삼척의 임원을 공격했는데, 그곳을 지키던 장수 하주려(何周呂·고려사에는 河周呂)가 나가 싸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 큐슈와 대마도를 초토화 시킨뒤 포로들을 끌고 둘아가던 동여진족들도 결국 동해상에서 고려 수군을 만나 크게 당하게 되는데요.
북한학자인 오붕근 박사가 쓴 '조선수군사'에는 당시 동해상에서 동여진족 해구들과 맞붙은 고려의 수군이 격전끝에 8척을 나포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일본인 다수를 구출해내는 전과를 올렸다는 내용도 있는데, 대마도 기록에도 '도이(刀伊)の적(敵)', 즉 야만의 오랑캐들에게 잡혀가던 남녀 포로들 다수가 고려 수군에 의해 구출됐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습니다.
*동해를 그리며 격동의 역사, 한장면을 떠올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