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공주 무령왕릉, 공산성- 웅진백제의 천년 유산을 만나다

좋은산 2015. 7. 23. 11:40

 

 

 

 

 

 수원 화성과 융건릉에 이어 7월 17일 오후에는 충남 공주를 다녀왔습니다.

 백제 문화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소식이 전해진 직후라 공주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더욱 경쾌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해 송산리고분군과 공산성 등 대부분의 백제 유적지들은 요즘 무료 관람 혜택이 더해지고 있더군요.

  그 또한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그네에게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주를 방문하는 것은 더듬어보니 어언 30년 이상이 흘렀네요.

 대학교 1∼2학년 때 답사를 하면서 공주를 방문한 이후 생활에 쫓겨 좀체 방문 기회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주 라는 도시의 생김새 자체도 이젠 아예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되었기에 사실 처녀 방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송산리고분군에눈 백제 문화재를 대표하는 '무령왕릉(武寧王陵)'이 있습니다. 송산리고분군의 제7호분인 이 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을 쌓아올린 전축분(塼築墳)이라는 것이 특징적 입니다.

 1971년 발굴 당시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재위기간 501년-523년) 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고, 4600여점에 달하는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고고학계와 사학계를 흥분시켰습니다.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을 비롯해 국보 지정된 것만 12종 17건에 달한다고 하니 무령왕릉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한성 백제에서 물러나 웅진에서 한동안 고구려에 대해 수세적 입장이었던 백제는 무령왕 대에 이르러 비로소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기반을 다시 공고히 다지면서 기술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갱위강국(更爲强國·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 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니 그가 다시 회복시킨 백제의 국력과 자부심을 새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갱위강국(更爲强國·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 은 송산리고분군 전시관에도 무령왕의 상징 처럼 표현돼 있습니다.

 

 

 

 

 

 

 

 

 

 

 

 

 

 

 

 이어진 답사 코스는 공산성(웅진성) 입니다.

 백제가 웅진에 터를 잡았던 475년-538년까지 '웅진백제' 기간 중 도읍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지에 석축과 토축으로 둘러싼 2.2km 둘레 산성 이라고 합니다.

 금강에 접해있는 사면의 경우 성벽 위를 거니는 것 만으로도 아찔할 정도로 경사가 급해 천혜의 요새지에 성을 쌓아 더욱 방비를 든든히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 멸망 뒤 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조선 인조 임금과의 인연으로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1623년 '이괄의 난' 때 한양을 점령당하고, 공주까지 피신했던 인조가 이곳 공산성에서 두 그루 나무 아래에 기대 애를 태우면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는데서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됐다는 소식에 기뻐한 인조가 두 그루 나무에 정삼품 직위를 내리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무가 없어진 자리에 쌍수정(雙樹亭), 정자가 지어져 인조 임금에 얽힌 스토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인절미'도 이괄의 난 때 임조 임금의 공주 피난에서 비롯된 이름 이라고 하는데요.

 임 씨 댁에서 임금에게 떡을 해 바치자 임조가 "그것 참 절미로다. 떡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었는데, "임 씨 댁에서 만들어 진상한  떡"이라고 하자 임조가 '임절미'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후일 발음하기 쉽게 '인절미'라는 떡 이름이 나왔다고 하네요.

 저녁 무렵, 금강과 공주시내를 굽어보면서 공산성을 한바퀴 도는 성벽 산책로의 운치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