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려시대 울릉도,독도와 강원도

좋은산 2014. 6. 10. 21:09

 (지난 2007년에 취재,작고한 울릉도,독도와 강원도(고려시대)의 역사입니다 )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 정벌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강원도 동해안울릉도, 독도로 통하는 통로면서 해양영토 수호의 전초기지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뤄진 이사부의 정벌로 우리역사에 편입된 우산국(울릉도, 독도)이 이후 우리 역사서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400여년 뒤인 고려 태조13년(930년).
 ‘고려사’를 살펴보면 아직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인 930년 우산국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첫 기록이 나온다.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방물을 바쳐왔으므로 백길은 정위(正位)로, 토두는 정조(正朝)로 각각 삼았다(芋陵島 遣白吉 土豆 貢方物拜 白吉爲正位 土豆爲正朝·고려사 권1 태조 13년 8월)”는 내용이다.
 이사부의 정벌로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사실을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지증왕 13년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했다”는 조공관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토산물을 바치는 것은 고려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930년에는 이미 고려가 현재의 강릉과 삼척, 울진, 울산 등까지 영역을 확장한 때.
 우산국으로 통하는 강원도 동해안 전초기지(城)들이 모두 고려에 속하게 된 상황이었고, 후삼국 통일이 무르익던 때였으므로 우산국에서도 공물을 바치는 대상을 고려로 변경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계의 일반적 분석이다.
 이후 고려 덕종 원년(1032년)에는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데, 여기서 ‘성주’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이사부에 의해 신라에 귀속된 뒤에도 우산국이 신라의 영향아래 발전하면서 지배자가 라말여초(羅末麗初)에 지방에 할거하던 성주 같은 지위를 유지해 왔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울릉도 일원은 이즈음 혹독한 시련기를 맞는다. 남쪽으로 대마도까지 동해 전역을 휘젓고 다니면서 살인과 방화, 약탈을 일삼은 동여진족 해구(海寇)들 때문이었다.
 고려사 현종9년(1018년) 기록에는 “우산국이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농기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원구 파견 기사는 고려사 식화지의 농상조에 기재돼 있으므로 농사를 돕는 일종의 권농사 자격으로 파견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이사부 정벌 이후 내륙에서 처음 관리를 파견한 기록이어서 주목된다.
 이듬해에는 “여진의 침략을 받고 (육지로)도망해 왔던 우산국 민호(民戶·백성)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진족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울릉도 주민들이 도망쳐 온 곳 또한 명주, 삼척, 울진 등 동해안이었음은 굳이 역사서를 들출 필요도 없다.

 독도박물관의 이재완 학예연구사는 “조선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남긴 ‘아계유고’라는 개인문집에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즈음 삼척 소공대(현재 삼척시 원덕읍 소재)에서 울릉도가 보인다”는 기록이 있고, 최근에는 동해시 초록봉 정상에서 울릉도를 사진으로 촬영하는데 성공한 일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울릉도에서 맑은 날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삼척, 울진, 강릉 일원은 줄곧 울릉도를 잇는 내륙 통로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산국이라는 명칭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1세기, 고려 현종 연간까지다. 그 이후부터 우산국은 울릉도 또는 우릉도(羽陵島), 우릉도(芋陵島), 무릉도(武陵島) 등으로 사서에 기록된다.
 고려는 여진족 침략으로 피폐해진 울릉도에 관원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의종 11년(1141년)에는 내륙의 주민들을 섬에 이주시킬 목적으로 현재의 강릉인 명주도 감창사(溟州道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섬의 자세한 지형지세를 조사한 뒤 조정에 보고하고 섬에서 가져온 ‘이상한’ 과실 씨앗과 나뭇잎 등을 헌상하기도 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또 의종 11년(1157년) 5월에는 왕이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金柔立)을 직접 울릉도에 보내 그 실상을 조사·보고토록 하기도 했다.
 현재의 강릉을 중심으로 동해안 일원을 관할하던 ‘명주도(溟州道)’가 울릉도를 연결·관리하는 역할 중심지로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우산국 여진족 침략 후 급격히 쇠퇴

 고려시대 현종 9년(1018년)과 10년의 기록을 끝으로 ‘우산국’이라는 명칭은 역사서에서 사라진다. 이 시기는 울릉도, 독도를 아우르는 우산국이 급격히 쇠락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우산국 해상세력 쇠락의 원인은 동 여진족 해구(海寇)들의 침입 때문으로 풀이된다. 북방에 근거를 두고 있던 동여진족은 이즈음 세력을 크게 확장, 울릉도는 물론 동해 전역을 휘젓고 다니면서 살인과 방화, 약탈을 일삼는다.
 고려사절요에는 1018년 11월 동여진족들이 우산국, 즉 울릉도를 침입한 기사가 전하고, 대마도 기록에는 이들 동 여진족들이 1019년 3월∼4월에 대마도와 남쪽 이키섬에 이어 규슈지방까지 들이쳐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다대(多大)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도저히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일본인들은 고려말로 ‘만이(蠻夷)’를 뜻하는 ‘도이(刀伊)の적(敵)’이라고 불렀다.
 여진족들은 대마도를 치기 전 울릉도를 먼저 침략해 중간거점으로 삼고 우리 동해안 등을 약탈한 것으로 분석된다.

 울릉도 주민들이 강릉, 양양, 삼척, 울진 등 강원도 연안지역과 예주(영해, 영덕, 평해 일원) 등 경상도 연안으로 숱하게 도망쳐 나온 것도 이들 여진족들이 울릉도에 눌러앉아 살인과 약탈을 자행한 때문으로 보인다.

 남아 있던 주민들도 농기구가 없어 농경생활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고려 조정에서 농기구를 보내주고, 도망나온 주민들을 예주 백성으로 편입케 한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이후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명칭 대신 주로 ‘섬(島)’으로 역사서에 표기된다.
 과거 고구려와 동해안 패권을 다투던 신라가 배후(우산국)의 위협을 걱정해 정벌에 나서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할 정도로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발전했던 우산국이 여진족 침략 후 급격한 쇠락기를 맞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