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묵호 등대, 그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속삭임

좋은산 2014. 5. 28. 23:01

 

 

 등대 처럼 무던히 선(善)하고 애틋한 조형물이 또 있을까?

 밤바다에 혹은 유성 처럼, 혹은 별빛 처럼 끊임없이 명멸하는 등대 불빛을 만나게 되면, 누구나 소년이 되고, 소녀가 된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로 시작되는 등대지기 노랫말 속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듯 등대는 사람들에게 가장 순결한 마음의 안식처 처럼 작용해 왔다.

 아무리 어지러운 마음도 등대를 만나면 어머니 품 속에서 옛날 얘기를 듣는 것 처럼 평화를 얻게되니 그 힘이 또한 경이롭다.

 

 그러나 한편, 등대는 바다 사람들에게는 생명줄 같이 소중하고, 비장한 존재이기도 하다.

 칠흑 같은 밤 바다에서 등대 불빛이 없다면 배는 어떻게 뱃길을 더듬고, 항구로 찾아들까? 마치 자동차가 라이트를 켜지 않고 도로 위를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근대식 등대가 우리나라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인천 앞바다 팔미도에 들어선 등대가 우리나라 근대식 등대의 효시다.

 그러나 팔미도 등대는 이 땅과 바다를 먹잇감으로 생각한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들의 배가 쉽게 드나드는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세워졌으니 근대식 등대의 첫 등장은 한편으로 씁쓸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08년에 세워진 동해안 포항 호미곶 등대도 일본 선박이 포항 앞바다에서 좌초한 것을 계기로 세워졌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물론 호미곶 일대가 부산∼원산을 항해하면서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위치가 되고, 암초가 많고 안개와 폭설이 자주 발생하는 등 선박 조종에 어려운 난제들이 많다는 현실적 필요가 호미곶에 등대를 세운 주된 이유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만, 등대를 세우기 직전인 1907년 9월에 일본 선박이 포항 앞바다에 좌초한 사실이 있기에 구전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렵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나라 근대식 등대의 출발은 약소국의 비애를 품에 안고 첫발을 내디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는 해양,수산 강국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가 돼 있으니 지나간 한세기, 밤 바다를 밝히는 등대와 함께 비약적 발전을 해온 우리의 발자취가 그리 초라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과정은 창대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고 표현하면 어울릴만도 하겠다.

 

 물론 등대의 역사가 근대와 동일선상에서 시작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이야 최첨단 항법설비를 갖춘 동력선이 지구촌 바다 곳곳을 누비고 있지만, 옛날에는 오직 사람의 힘과 바람에 의존하는 무동력 범선 뿐이었으니 등대의 쓰임새는 지금보다 오히려 옛날에 더 소중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근대식 등대 등장 이전에는 횃불과 봉화, 깃발 등이 등대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와 관련, 최근 부산지방해양항만청은 우리나라 등대가 일본보다 오히려 더 빠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지도를 발견해 공개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336년전인 1678년에 제작된 조선시대 초량왜관 고지도를 살펴보면, 방파제 중앙부분 양쪽 끝에 현재의 등대와 같은 '등명대' 2기가 설치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또 부산세관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1886년 부산해관 기록물 조사 결과에서도 부산항 진입항로상 작은 바위 위에 2개의 등표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1678년 초량왜관 고지도의 '등명대' 시설을 기준으로 삼으면, 인천 팔미도 등대보다 225년이 앞서고, 일본의 등대보다도 190년이나 빠르니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역시 일찍부터 등대 운용에서 앞선 기술과 지혜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뱃길 운용의 역사와 함께해온 유서깊은 등대가 동해시 묵호에도 있다.

 아니 '묵호에도 있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라, 묵호등대는 '동해안을 대표하는 등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941년 무연탄 무역항 및 어항으로 개항한 묵호항의 쓰임새가 커져 선박 출입이 늘어나자 1963년 6월8일 묵호등대가 처음 불을 밝히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꼭 묵호항 개항 73년, 묵호등대 건립 51년을 맞았다.

 최근 그 묵호등대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바닷가 외진 언덕, 사람들의 접근 조차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던 등대지구가 해양문화, 관광지구로 탈바꿈하면서 연중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변화도 드물 것이다.

 해질녘, 묵호등대의 언덕에 올라 가장 서민적인 묵호항의 풍광을 동공에 담고,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 불빛의 궤적을 좇다보면, 해묵은 추억의 페이지가 한장한장 넘어가면서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또 하나 동심의 등불을 켜게 된다.

 

 등대지구를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시(詩)와 그림,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들 것 같은 가파른 언덕 비탈면에 동화처럼 자리잡은 카페, 그리고 그 아래 항구와 수평선까지 오늘의 묵호등대는 낮에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파도가 치면 바닷물이 이곳까지 튀어 오르지나 않을까. 마치 금방이라도 바닷물로 첨벙 뛰어들 것 같은 비닷가 비탈면의 작은 터에 자리잡은 카페가 나그네를 그냥 보내지 않는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시(詩)가 파도치듯 새겨져 있는 묵호등대 해양문화공간의 벽면))

 

 

 

 

 

 

 

 

 

    (묵호등대 옆에 마련된 작은 쉼터. 안에는 소박한 의자 시설과 함께 읽을거리 책도 여러권 비치돼 있다)

 

 

 

 

 

 

 묵호등대지구는 '벽화마을'로 유명한 '논골담길마을'과 통한다.

 논골담길 마을은 묵호항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뒤안길이나 마찬가지다.

 그 옛날, 오징어와 명태가 지천으로 잡히고, 무연탄과 시멘트가 줄지어 운반되면서 묵호항 주변에 일자리가 넘쳐나던 시절에 모여든 사람들이 묵호등대 주변의 고지대 언덕길에 다닥다닥 집을 짓고 살아 오늘의 논골담길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아랫쪽에는 뱃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대쪽 언덕에는 고기를 널어 말리는 '덕장'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묵호항으로 들어온 오징어와 명태를 지게와 고무대야에 담아 언덕 위 덕장까지 옮기면서 물이 흘러 비포장 흙길이 항상 논 처럼 질척거렸다고 해 '논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지명의 유래 또한 애잔하다.

 오죽했으면 논골에서는 마누라,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그 애환의 현장인 논골담길 마을이 요즘 감성관광지로 뜨고 있다.

 묵호항의 역사를 되새김 해주는 옛날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추억에서부터 누구나 품고 있는 유년기의 추억 등 묵호항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논골담길 마을에 벽화로 그려지면서 감성과 추억의 관광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바쁘고, 어지럽기 이를데없는 디지털 세상에서 쉼표를 찍고, 느릿느릿 한시름을 돌리는 아날로그의 추억을 발견하게 되는 감성 회복 공간 이라면 이해가 쉬울까.

 

 아래 사진은 논골담길 마을이 아니라, 어달동 횟집센터 해안도로 쪽에서 묵호등대로 오르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논골담길 풍경화는 여기서는 담지 않았으니 직접 확인해 보시라. 

 

 

 

 

 

 

 

  (이 출렁다리는 TV 드라마 '찬란한 유산' 촬영지라고 한다. 묵호등대는 1968년 영화 '미워도 다시한번'의 주요 촬영지였던 것을 기념해 '영화의 고향' 기념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빈 벽면에 많은 추억을 적어 놓았다. 아예 그럴듯한 추억 남기기 공간으로 꾸몄으면 좋겠다)